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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에서 만난 중국 현대 100년의 얼굴] <3> 덩샤오핑과 변화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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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에서 만난 중국 현대 100년의 얼굴] <3> 덩샤오핑과 변화의 강

입력
2012.06.1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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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는 죄가 아니다"… 공산 혁명가의 '또 다른 혁명' 개혁·개방

중국 쓰촨(四川)성 광안(廣安)시 덩샤오핑(鄧小平)기념관에는 그의 젊은 시절 인생행로를 나타내는 지도가 있다. 지도 속 붉은색 화살표는 강을 따라 흐른다. 광안을 끼고 흐르는 작은 물길을 떠난 화살표는 창장(長江)으로 흘러 들어 상하이(上海)까지 뻗어 바다로 나간다. 큰 타원을 그리며 바다를 건너 프랑스에 도착한 화살표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모스크바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다. 1904년 광안에서 태어나 열네살에 고향을 떠난 덩샤오핑은 이 길을 따라가며 공산주의 혁명가로 변신해 1927년 귀국했다.

덩샤오핑의 나머지 인생행로를 지도에 이어간다면 화살표는 거의 중국 대륙 전역을 누빌 테지만 결코 출발점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생전에 다시 고향을 찾지 않았던 덩샤오핑은 2004년 태어난 지 100년 만에 동상으로 귀향했다. 수목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초목이 우거진 기념관에선 인자한 노인의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덩샤오핑의 동상이 있다.

덩샤오핑이 고향을 찾지 않은 이유에 대해 기념관에서 만난 사람들은 몰래 찾아와 민생탐방을 했다는 둥, 국가 일에 바빠서 시간이 없었다는 둥 나름의 설명을 했다. "덩샤오핑은 용띠인데 용은 앞으로만 나가지 뒤로 가지 않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란 색다른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용틀임'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처럼 그는 평생 실각과 재기를 반복했다. 첫 좌절은 1933년 도시혁명을 추진하는 당시 중국 공산당 주류에 맞서 농민 조직을 통한 게릴라 전술을 주장하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지만 두 번째 실각은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반대 편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문혁 때 덩샤오핑은 인생에서 가장 긴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권력에서 쫓겨난 덩샤오핑은 창장의 지류 간장(赣江)이 흐르는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1969년 10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트렉터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며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난창의 트렉터공장은 덩샤오핑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사용했다는 줄칼과 작업대가 당시의 시련을 증명하고 있었다. 60대의 덩샤오핑은 10대 때 프랑스에서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며 익혔던 기술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공장 뒤편에는 '덩샤오핑 오솔길(小平小路)'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길이 있다. 덩샤오핑은 매일 이 길을 걸어 1.5㎞ 거리에 있는 집을 오갔다. 기념관 관계자는 "노동자들과 일하며 인민의 현실을 체험한 덩샤오핑은 이 길을 걸으며 개혁ㆍ개방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이 구상을 실현할 기회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에야 찾아왔다. 1978년 74세의 나이로 최고 지도자에 오른 덩샤오핑이 일으킨 변화의 물결은 거셌다. "봉건사회에서 시작한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할 수 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니다"…문혁 때 자본주의의 길을 추종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왕년의 주자파 (走資派) 덩샤오핑은 공산국가 지도자가 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을 쏟아내며 개혁ㆍ개방의 물꼬를 텄다. 농촌의 집단생산체제가 폐지되고 개인경작이 허락됐다. 1980년에는 서부 해안을 따라 경제특구를 지정해 경제개발을 본격화했다. 문혁 이후 사실상 폐지했던 대학입시도 부활했다. 1979년에는 공산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카우보이 모자를 쓴 유명한 사진을 남겼다. 성과도 놀라웠다. 1978년부터 20년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9.8% 성장을 기록해 그 전보다 20배 이상 치솟았다. 덩샤오핑이 일으킨 변화의 흐름은 오늘날 세계 2위 경제 대국 중국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은 1986년 미국 CBS방송 '60분'의 마이크 월리스와 인터뷰하면서 "사회주의의 치부는 당신들과 달리 인민 공동의 것이며 일부 사람이 먼저 부유해지기를 허락하는 것은 공동의 치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그의 바람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덩샤오핑 기념관을 방문하고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머문 난창역의 대합실에서 그것을 느꼈다. 인파로 가득찬 일반대합실에서 사람들은 바닥에 신문 등을 펴고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10위안(약 1,800원)을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고급 대합실은 다른 세상이었다. 즐비한 의자와 별도 화장실까지 마련된 고급 대합실의 이용자에겐 기차를 미리 탈 수 있는 특권까지 주어졌다. 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중국의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는 이미 0.5를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2008년 평균 지니계수는 0.314고 한국은 0.315이다.

덩샤오핑의 생가가 있는 광안시는 지난해 5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구미시와 자매결연을 했다. 양국에서 경제개발을 이끈 지도자를 배출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작은 키, 반전을 거듭한 인생 등 두 사람은 경제개발 외에도 공통점이 많다. 부정적 유?또한 비슷하다. 그들은 불평등이라는 풀기 어려운 숙제를 남겼으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폭력으로 답했다. 후싱도우(胡星斗) 베이징(北京)이공대 경제학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덩샤오핑은 국문을 개방하여 공이 아주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경제 개방에만 적극적이었고 정치개혁을 하지 않아 현재 중국이 겪고 있는 위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광안ㆍ난창=류호성기자 rhs@hk.co.kr

■ 덩샤오핑 고향의 농부 덩페이비씨

그녀의 성도 덩(鄧)씨였다. 덩샤오핑 생가에서 차로 10분쯤 걸리는 농촌 마을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 앞에 앉아 있는 덩씨를 만날 수 있었다. "덩샤오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덩씨에게 이름을 써달라고 하자 "학교를 다니지 않아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친척 소개로 결혼한 58세 동갑내기 부부는 평생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중국의 농촌 생활을 묻자 덩씨는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쉰다"는 진리를 말해줬다.

하지만 덩씨를 비롯한 이곳 농민들의 삶은 집단생산단위인 생산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덩씨는 "생산대 시절에는 마을 사람 300여명과 공동으로 일하고 분배를 받았다"고 말했다. 분배는 가족 수대로 이뤄졌는데 성인 남성이 10을 받으면 성인 여성은 8을, 미성년자는 5를 받는 식이었다. 하지만 생산량이 충분치 않아서 1년에 3분의 1은 쌀밥을 먹지 못하고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끼니를 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묻자 남편과 함께 "1961, 62년"을 연발했다. 마오쩌둥이 주도했던 대약진운동의 후유증과 흉년이 겹친 시기다. 당시 7, 8세였다는 부부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풀이라도 뜯어 먹으러 산을 돌아다녔다"고 기억했다.

1980년대 들어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ㆍ개방이 본격화하면서 이 마을의 생산대도 폐지됐다. 덩씨는 "가족 수대로 땅을 분배받았는데 땅을 개량하고 일하는 자세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살림도 나아졌다. 거의 매끼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생산대 시절에는 받아보지 못한 현금도 손에 쥘 수 있었다.

덩씨 부부는 딸 둘을 뒀는데 모두 초중학교(중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나갔다. 올해 33세인 큰 딸은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으로, 다섯 살 터울의 작은 딸은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로 나가 일했다. 선전은 1980년 덩샤오핑이 가장 먼저 경제특구로 지정한 곳이고 원저우 역시 동부 해안의 대표적인 상업도시다. 덩씨는 뒤에 있는 흰색 2층 집을 가리키며 2005년에 딸들이 8만위안을 들여 지어줬다고 했다.

이 집에는 덩씨의 손녀도 함께 살고 있었다. 선전에 있는 큰 딸이 낳은 손녀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중국의 '현대판 신분제' 호구(戶口)제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을 엄격히 분리하는 호구제 때문에 농촌 출신 부모를 가진 손녀는 선전에서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 옆에서 동네 꼬마들과 놀아주다가 수줍게 할머니 옆에 앉은 손녀는 "이곳에 사는 것도 괜찮다"며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소학교(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손녀가 할머니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줬다. 덩씨의 이름은 덩페이비(鄧培碧)였다.

광안=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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