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던 장편이 있었는데 한 줄도 쓸 수가 없더라고요. 왜 이렇게 소설이 안 써질까 고민하다가 내가 패턴에 갇힌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원래 준비를 많이 해서 쓰고 구성을 치밀하게 하려는 편인데 그것마저 패턴처럼 여겨졌어요. 이번에는 내 원칙에서 벗어나 써보려 했습니다."
소설가 은희경(53)씨가 일곱 번째 장편 <태연한 인생> (창비 발행)에서 보여주는 '프리스타일'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호흡이 느껴진다. 정격 소설의 전범으로 꼽히던 은씨의 예전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서술이 때론 장황하다 싶고 복합적 구성에 잦은 형식 변주로 이야기 흐름을 붙잡기가 만만찮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태연한>
그런데 그게 이번 소설의 묘미다. 내키는 대로 즉흥 연주를 하는 듯하지만 결국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고급한 재즈 공연처럼 말이다. 은씨는 "평소 실력으로 중요한 시험을 치른 사람이 느끼는 후련함"이란 말로 출간 소감을 밝혔는데, 작품을 읽고 나면 그 말이 겸허가 아닌 뿌듯한 성취감의 표현이라고 기꺼이 오해할 듯싶다.
주인공 남녀 중 좀 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이는 남자 요셉. 삶과 인간 관계에 있어 정해진 패턴을 거역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사에 독선적이고 까다로운 소설가다. 그가 보기에 세상일은 최악과 차악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고약한 일이다. "요셉은 둘 중 어느 자리에도 가지 않음으로써 무조건 오답을 택하게 돼 있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저항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79쪽) 화려한 독설로 상대를 묵사발 내거나 여자들을 호리는 것도 그의 오랜 일상이다.
시쳇말로 쿨한 요셉의 태도는 그러나 가면일 뿐이다. 문단의 권력행태와 상업주의에 대한 그의 비난에는 잊혀져 가는 작가로서의 초조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좀처럼 작품을 쓰지 못한다. 작가 은씨의 심경이 그에게 고스란히 투영된 셈이다.) 별거 중인 아내, 불륜 상대인 유부녀와의 관계에서도 냉소를 가장한 속물근성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10년 전 잠시 동거했던 옛 연인 류를 향한 낭만적 연정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별 수 없는 나르시시스트임을 보여준다.
여주인공 류의 이야기는 주로 과거를 향한다. 무책임하고 낭만적ㆍ충동적 기질이 다분한 아버지, 아내로서 어미로서 정해진 인생 패턴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어머니. 서로에게 신뢰와 애정을 잃고도 16년 간 결혼 생활을 이어간 부모 사이에서 그녀는 인생과 사랑의 이치에 일찍 눈뜬다.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그녀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16쪽)
그녀가 오래 전 요셉을 떠났던 것도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으며 그들의 열렬한 사랑 역시 그런 한시성의 소산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장편 <새의 선물> 의 되바라진 소녀 진희를 필두로 매혹보다는 단연 냉정의 편에 섰던 은희경 소설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류는 생을 조화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새의>
요셉이 후배인 영화감독 이안에게 영화 출연 제의를 받으면서 사건은 긴장감 있게 진행된다. 요셉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이안은 요셉의 가식과 허위를 폭로할 영화를 만들려 한다. 요셉에게 버림받은 여제자의 친구와 공모, 요셉을 술자리에 불러 도발한 뒤 그의 추태를 몰래 촬영하려는 것이다. 요셉은 이안의 속셈을 감지하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자리에 영화 지원 기관의 팀장 자격으로 류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소설은 요셉의 독백, 영화 트리트먼트(기획안), 시나리오 형식을 오가며 다채롭게 변주한다. 이야기로써 재미는 물론, 요셉의 말과 류의 사유를 통해 인생과 사랑을 통찰하는 격조 있는 에세이로도 은씨의 이번 소설은 독자의 기대에 답한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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