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부독재 무너뜨린 그 정신이 잊혀져 아쉽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6ㆍ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린 서울 신촌동 연세대 정문. 허공을 가르던 최루탄이 스타카토처럼 짧은 파열음을 내며 연달아 터지자 사방이 뿌옇게 변했다. 잠시 뒤 또 한 번의 파열음이 울렸고, 교내로 달리던 이한열(당시 21세ㆍ연세대 경영학2)씨가 픽 쓰러졌다. 최루탄에 직격으로 맞은 뒤통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주변 학생들이 이씨를 안고 치과대학(현 100주년기념관 자리)까지 왔을 때쯤 정문 오른쪽을 지키던 이씨의 학과 1년 선배 김종원(46ㆍ영화제작사 북극성 대표)씨도 급히 달려와 '제발 큰 일은 생기지 마라'는 듯 간절한 몸짓으로 후배를 안았다. 근접촬영을 하려고 학생들과 함께 있었던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73)씨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최루가스와 땀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김씨가 피를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이한열씨를 안아 옮기는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 한 장은 6월 항쟁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2012년 6월 4일 서울 신촌동 연세대 교내 '이한열 추모비' 앞. 흰 머리가 수북한 정씨와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의 김씨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정씨는 김씨를 보자마자 "사진 찍혔을 때 보다 살 많이 쪘네"라며 단박에 알아봤다. "저를 어떻게 알아보세요?"라며 놀라워하는 김씨에게, 정씨는 가볍게 웃었다. 말은 않았지만 '역사에 담긴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라고 답하는 듯 했다. 정씨는 "사진 속 사람들은 다 알아봐. 살은 좀 쪘어도 얼굴 윤곽은 그대로 있네"라며 김씨와 반갑게 악수했다.
6월 민주항쟁 25년이 된 지금도 민주주의 신새벽을 열었던 그날의 비극적 장면은 두 사람의 뇌리에 여전히 생생했다. 정씨나 김씨나 "아직도 그 사진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며 "국민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6월 항쟁의 정신이 점점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날 대부분의 사진기자들이 학생과 경찰의 충돌과정을 찍기 위해 연세대 정문 맞은 편 철길 주변에서 취재하고 있었지만 정씨는 카메라를 들고 학생들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 바람에 정씨는 역사의 한 장면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다.
김씨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한열이를 급히 안았지만 당시 얼마나 중한 상태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한열씨는 그로부터 한 달여를 의식불명 상태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였다.
87년 7월 5일 일요일 오전. 6ㆍ29 선언 후 봉쇄가 풀려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연세대 정문이 갑자기 잠기고 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6ㆍ29선언 후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이라 '쇼크'였죠. 순간 '혹시 한열이가'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이한열씨는 이날 새벽 2시쯤 신촌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꽃 같은 생을 마감하고 민주주의 제단에 바쳐졌다.
김씨는 입으로 전해진 이한열씨 사망사실을 하루빨리 학교 안팎에 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당장 쥐고 있는 현금도 없고 휴일이라 은행도 쉬었다. 그 때 그는 2년 전 아버지로부터 입학선물로 받았던 금반지와 고급 캐논 카메라가 떠올랐다.
"반지와 카메라를 들고 신촌 주변을 헤매다 신촌시장 전당포를 보고 무작정 문을 두들겼죠. '한열이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리려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자 전당포 주인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생각 이상으로 값을 많이 쳐줘서 30만~40만원 정도를 받았죠. 그 돈으로 산 천, 페인트, 복사용지로 유인물과 플래카드를 만들어 학생과 시민들에게 알렸어요."
그 해 6월의 경험은 지금도 김씨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김씨는 졸업 후 월간 지 기자로 활동했고 97년 영화계에 입문해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등을 제작했다. 그는 "어디에서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6월 항쟁 정신에 따라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김씨는 지금 6월 항쟁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그는 "영화로 여러 번 다뤄진 5ㆍ18 민주화운동은 엄청난 교훈을 줬으나 비극이었던 반면 6월 항쟁은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기에 희망의 영화가 될 것"이라며 "시나리오도 구상 중이고, 통사로 할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할지, 아니면 인물에 포커스를 둘지 등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러한 김씨의 생각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정씨는 28년간 취재현장을 누비다 95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대장수술 등으로 몸이 불편했다"며 "수 년간 집회에서 독한 최루 가스에 노출돼 더운 곳에서 땀을 흘리면 온 몸이 解緞?달아오르는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에게 6월 항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김씨는 "총칼 밑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지 몰랐던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세상이 바뀌니까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깰 수 있구나',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구나'라는 걸 실감했다"며 "국민이 자신감을 회복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정씨는 "오늘날 민주화와 경제발전으로 편하게 사는 만큼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피땀 흘린 것"이라며 "민주화에 청춘을 바친 학생 등을 기리기 위해 국가차원의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 낡아버린 87세대 '87년 6월'의 위기
작년 가을. 1980년대 철완(鐵腕) 최동원이 저세상으로 떠났다. 불세출의 강속구 투수였던 그의 죽음에 모든 사람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야구 선수 최동원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야구계 밖에서 야인처럼 살아야 했는지에 관해선 관심을 지녔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는 한 스타 야구 선수의 생각과 인생 행로를 바꿔놓았다. 실제 87년 6월 당시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하기도 했던 최동원은, 87년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해태 투수 김대연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생계가 막막해진 유족을 위해 저임금에 시달리는 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수협의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같은 해 7~9월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정부와 자본가의 완강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최동원은 구단의 눈에 가시가 되어 삼성으로 트레이드 돼버렸다. 최동원에게 87년과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는 자신에 대한 '망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012년 6월, 87년 6월 항쟁 25주년이 되었다. 당시 대학 1학년이었던 87학번들이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고, 87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덧 2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있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났다. 25년 전 거리에서 외쳐졌던 직선제 개헌, 군부 독재 타도,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기본 인권 신장, 정당 간 자유로운 경쟁을 포함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90년대 이후 여야 간 정권 교체, 군부의 정치개입 차단 등으로 어느 정도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20대에 87년을 겪은 세대들에게 87년 6월은 '승리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추념된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군부독재 아래에서 자유를 상실했던 젊은이들에게 87년 거리에서 정치, 자유, 해방구 등 체험은 군부독재라는 절대 악을 자신들의 힘으로 붕괴시킨 '승리한 세대'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만했다. 거리에서 받은 환호, 전투경찰에 대한 무장 해제,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폭발적 해방감 그리고 6ㆍ29라는 '항복 선언'은 이들 세대에게 무용담처럼 이야기되어 왔고 아직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김현은, "자기 세대의 문제를 가지지 못한 세대는 세대라는 이름에 합당하지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4ㆍ19세대였던 그는 자기 세대의 진보성을 강조하려고 이런 언급을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87년 6월을 체험한 세대에게 직선제, 민주화는 이전 세대가 공유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문제'였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뒤 87년 세대는 자신의 승리의 체험을 '386세대'라는 세대 담론으로 만들어서 제도권 정당 진입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자기 세대의 문제를 내세우고 한국 사회 전면에 등장했던 이들 세대의 정치적 대리인들은 지난 10년간 실망과 절망을 지지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들은 87년 6월 이후 심화되어야 할 민주주의의 과제를 잊어버렸다. '진보-개혁'이란 수사 속에서 87년 형식적 민주화 이후 잊어서는 안 될 문제들을 이들은 망각해버렸다. 그것은 386세대 정치인들뿐만이 아니었다. 87년 6월 민주화를 자기 세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87년 세대들도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당시 '프티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했던 삶과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각에선 87년 세대 부모들이 2000년대 촛불세대를 낳은 진보적인 부모라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주요 선거 때마다 '40대 대망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촛불은 단발마와 같은 흐름이었고 선거는 4년에 한번씩만 정치권에 던질 수 있는 '종이돌'(paper stone)일 뿐이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민주주의를 자신의 문제로 사유하는 개인'이라기보다, 경쟁과 상승을 위한 몰입에 공모한 세대가 아닐까? 과연 87년 민주화를 체험한 세대들이 사회적 타자와 공감, 공동체를 위한 공유와 연대를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이제 다가오는 일요일인 6월 10일에 전국 곳곳에서 6월 항쟁 25주년을 기념하는 범국민행사가 개최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87년 6월은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낡은 언어와 상상력 안에 갇혀있다. 25년이 지난 87년 6월이 국민, 기념, 민주주의, 승리 등의 관행적 상상력에 갇혀서는 80년 광주의 전철을 비슷하게 밟을지도 모른다. 87년 6월은 기념하기보다 성찰되고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더 이상 87년 세대가 사용하는 민주주의, 개혁, 독재 그리고 승리라는 말은 변화한 한국 사회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낡아버린 것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점에서 87년 6월은 위기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 박종철·이한열 죽음이 '反군사독재 항쟁' 도화선
대통령 직선제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길을 튼 1987년 6월 항쟁은 수십 년간 계속된 군사독재에 대한 민주세력의 지난한 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전국민적인 저항을 촉발한 도화선이 된 건 두 젊은이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87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내각책임제를 통한 권력의 유지를 모색했고, 야권을 포함한 민주세력은 이에 맞서 민주헌법 쟁취,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이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학생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학생운동 선배의 소재 추궁과 함께 물고문을 당하던 중 1월 14일 숨졌다. 경찰은 "조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억'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사건의 은폐조작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전두환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막기 위한 이른바 '4ㆍ13호헌' 조치를 내렸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 및 경찰의 은폐조작을 폭로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됐다.
6월 9일 또 한 명의 대학생이 쓰러졌다. 연세대 학생 이한열은 학교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뒤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끝내 숨졌다.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서울의 거리시위가 명동성당 점거농성으로 이어지며 6월 항쟁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됐다.
24일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했다. 이날 하루만 전국 37개 도시에서 130만명이 참가했다. 국민적 저항의 불길은 거세지자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골자로 한 '6ㆍ29선언'을 발표했다.
6월 항쟁에는 기존 반정부 시위와 달리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적극 참여했다. 그만큼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거셌다는 뜻이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저서 (돌베개)에서 6월 항쟁을 1945년 8ㆍ15해방, 1960년 4ㆍ19혁명에 이어 한국인이 맞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강조한다.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통해 오늘날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평가다. 6월 항쟁은 같은 해 7~8월 노동자대투쟁과 농민집회 등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6월 항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된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 "지역주의·권위주의 팽배 여전… 민주화는 미완성"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갖춘지 25년. 새 세상에 대한 기대속에 태어난 ‘87년 둥이’들은 6월 항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또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민주적이라고 여기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7년생 6월 축제 기획단’에서 6월 항쟁 25주년 기념행사를 직접 꾸리고 있는 ‘87년 둥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7차 교육과정 당시 국사과목에서 처음 분리된 근현대사 과목을 통해 6월 항쟁을 처음 접했다. 이지혜(25)씨는 “근현대사 시간에 6월 항쟁에 대해 배우던 중 고 박종철군 사망 당시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정부의 변명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직 우리 사회에 완전한 민주화는 오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강다혜(25)씨는 “6월 항쟁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는데, 이후 각종 투표에서 지역주의가 팽배한 것을 보면 그토록 어렵게 얻어낸 성과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같다”고 아쉬워 했다. 이지혜씨는 “아직 우리 사회는 어떤 발언을 할 때 큰 부담을 갖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준 부결 사례를 들었다. 그는 “조 후보자가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고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을 뿐인데도 인준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다양한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완결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여전히 권위적인 대학 문화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이재영(26)씨는 “전통이 있다는 학과의 경우 교수님부터 학부생까지 의사 결정 구조가 수직적인 경우가 많다”며 “엠티를 가도 의견 수렴은 형식일 때가 많고, 회의를 해도 학생이 발언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현실의 문제 때문에 학생 사회가 파편화되면서 학교측의 일방적 학사운영에도 학생사회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강씨는 “비싼 등록금에 대해 누구나 불만을 갖고 있지만 취업이 우선이다보니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학생회가 등록금 투쟁을 해도 학교측이 꿈쩍하지 않으면 학생들도 쉽게 포기하고 만다”고 말했다. 당장의 현실적 문제 때문에 학내 민주주의의 실현이 어렵다는 것이다.
감당이 안될 만큼 비싼 등록금, 열악한 학생 주거환경, 취직율 향상을 위해 ‘스펙’에 도움이 되는 공모전 준비를 노골적으로 종용하는 수업 등 대학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 같은 문제 제기를 수용해 학교에 개선안을 요구해야 하는 학생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이재영씨는 “최근 학생회는 재단 비리 등 목소리를 내야 하는 부분에서는 침묵하고, 축제 때 어떤 연예인을 부를 것인가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노고은(25)씨는 “취업이 가장 큰 문제인 지방대에서는 학생들이 학생회에 기대를 하지 않아 학생회장 선거 투표율이 낮다”며 학생들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요건은 무엇일까.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양극화를 체감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개선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다들 고민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민주화를 완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박하늬 인턴기자 (숙명여대 국어국문 3학년)
■ 6월항쟁 주역들 지금은 뭐하나
6ㆍ10항쟁은 넥타이부대인 평범한 직장인과 대학생이 주축이 돼 '지도부가 없는 시위'로 불린다. 하지만 이들을 지지하고 이끈 종교계와 지식계층, 재야인사 연대기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와 대학 총학생회장들로 구성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25년 전 전두환 군사정권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던 6월항쟁의 주역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시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며 '독재타도'를 외쳤던 운동권 인사 상당수는 제도권 정치에 흡수됐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전대협 초대 의장을 맡아 명동성당 농성 등을 주도한 이인영(47) 민주통합당 의원은 대학 졸업 후에도 전민련(전국민주민족연합) 등에서 활동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2004년 17대 총선 탄핵 열풍 속에 당선됐다. 18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는 19대 총선에서 국회 재입성에 성공, 당내 486그룹의 대표주자가 됐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전대협 부의장을 맡았던 우상호(49) 민주통합당 위원은 2000년대 초 정치권에 입문, 17대ㆍ19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아 재선의원이 됐다. 그는 최근 당대표 경선에도 참여했다.
정치가 아닌 다른 길을 걷는 이들도 있다. 시위 도중 구속되는 바람에 1학기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그만둬야 했던 이남주(46)씨는 95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가 됐다. 현재 교무처장도 맡고 있으며 지난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에서 활동했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집회 사회를 도맡았던 우현(47)씨는 '올드미스다이어리' '황산벌' '뿌리깊은나무'등에서 활약한 영화배우가 됐다.
국본 참여 인사 중 3명이 대통령이 됐고 국본 출신 대부분은 정계 거물이 됐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본에서 고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도심 시위를 기획하고 지휘한 상황실장이었던 이해찬(59) 민주통합당 의원은 6선 의원이 됐다. 민청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으면서 국본 공동대표를 맡아 옥중 단식투쟁을 했던 김근태 의원(3선)은 지난해 말 별세했다.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친누나로 국본 상임집행위원이었던 유시춘(62)씨는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최근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지지모임인 '담쟁이포럼'에 참여했다. 보수 정치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국본 집행위원이었던 이재오(67) 새누리당 의원은 민통련 조국통일위원장 등을 거쳐 신한국당에 입당, 현재 5선 의원이다. 국본 대변인이었던 인명진(66) 목사는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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