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속 썩는 일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법한데 속을 들여다보면 문제 없는 집이 없다. 그 중에 빠지지 않는 문제가 속 썩이는 자녀다. 사춘기를 맞는 나이가 점점 어려져서 이제 초등학교 3-4 학년이면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슨 얘기를 해야 얘기를 나눌 수 있을지, 어떻게 말해야 마음을 열 수 있을지 속수무책이다. 몇 차례 인내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다가 끝내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마음은 더 냉담하고 입은 더 무거워진다. 친구들끼리는 밤을 새워 카카오 톡을 하고 종일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부모와는 한마디가 힘들다. 부부는 어떤가. 제대로 마주 앉아 본 적이 언젠가. 마음 속 깊은 얘기를 나눈 지는 또 언제인가. 남편은 종일 일터에서 힘겨웠고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집안 일에다 아이들 살피느라 몸과 마음이 천근인데 정작 부부간에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오죽하면 카페에서 마주 앉은 남녀가 부부인지 애인인지 분별하는 기준이 대화일까.
얘기가 없으면 어떤가. 문자로 주고 받으면 되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회의 기초는 관계이고 관계의 옷은 대화이다. 대화가 사라지는 것은 진지하고 깊은 관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SNS로 인격적인 소통은 쉽지 않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는 단순히 말과 말의 소통이 아니라 체취와 체취의 소통이고 인격과 인격의 소통이다. 그렇다.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진정한 소통은 전인격적이다. 그 많은 SNS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벽이 여전한 까닭은 비록 무수한 미디어가 말꼬를 트기는 했어도 마음을 열어젖히지 못한 탓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카톡의 네트워크는 지경을 한없이 넓혀 놓았지만 또래문화와 끼리관계의 터가 확장되었을 뿐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접하기가 힘들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힘들다. 그래서 다시 만나야 한다. 촛불집회와 같은 대중집회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만남이 절실하다. 사람의 정서와 인간의 체취가 짙은 대화가 더욱 절실하다. 사랑을 심고 믿음을 나누며 꿈을 품는 얼굴과 얼굴의 대화가 절실하다.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더 깊은 대화가 없다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는 없다. 겉도는 관계와 피상적인 관계로 인간의 내면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소리 없이 팔로우하고 소리 없이 언팔로우하는 관계로 공동체는 이뤄지지 않는다. 말꼬는 트여야 하고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
대화는 마주앉는 일로 시작한다. 마주앉는 일이야말로 상대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행동이고 기본적인 예의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마주앉아야 한다. 부모가 자녀와 마주앉아야 한다. 아무리 자녀들 과외가 많아도 아무리 부모들 스케줄이 바빠도 마주앉아야 한다. 부부가 마주앉아야 한다. 서로 사랑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이 식었다면 다시 사랑하기 위해 마주앉아야 한다. 감정의 응어리가 쌓였다면 그 응어리를 풀기 위해,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면 무슨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바로 알기 위해 마주앉아야 한다. 그 누구보다 정치인들이 마주앉아야 한다. 국회의원을 새로 뽑고도 국회 문을 열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건 없이 마주앉아야 한다. 해야 할 얘기를 밤새워 할 수 있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의무이고 특권이다. 디지털은 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으나 아날로그 없이 관계를 숙성할 수 없다. SNS가 대화의 말꼬를 틀 수 있으나 마주앉지 않고 우리 앞에 가로놓인 난제를 풀 수 있는 길은 없다. 마주앉는 일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최소한의 대가이다.
조정민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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