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장은 유구무언이라 했는데 지금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저희 팀을 아끼고 성원해 주시는 모든 분께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 뿐 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연패의 수렁에서 벗어나 신생팀다운 활기찬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훤칠한 키, 호남형 마스크에 야구도 잘 해 '반상의 박찬호'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바둑리그 SK에너지 감독 윤현석(38) 9단의 얼굴이 요즘 눈에 띄게 까칠해졌다. "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닌데…"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실은 본인이 말하나 마나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요즘 팀 성적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현석이 올해 첫 사령탑을 맡은 신생팀 SK에너지가 한국바둑리그 개막전에서 정관장에 3대2 역전승을 거둔 이후 무려 여섯 경기를 내리 져 7라운드 현재 10개 팀 가운데 최하위로 밀려났다. 초보 감독으로서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 한게임이나 신안천일염과의 경기서 졌을 때만 해도 승부는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스마트오로와 티브로드에게 연패를 당하고 나니까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멍해지더군요. 그 이후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느낌이에요. 라이벌 Kixx와의 경기나 최근 포스코LED와의 경기 모두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무척 아쉽습니다."
당초 바둑리그 출전팀 선수 선발이 완료됐을 때만 해도 1지명 최철한, 2지명 안국현, 3지명 김동호, 4지명 진시영, 5지명 조혜연으로 구성된 SK에너지는 대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신안천일염이나 포스코LED만큼 강팀은 아니지만 최소한 4강권에는 충분히 들 수 있을 만한 팀으로 꼽혔다.
그러나 막상 리그가 시작되고 보니 결과는 최악이었다. 특히 믿었던 1지명 최철한과 2지명 안국현의 부진의 골이 너무 깊다. 7라운드 현재 최철한이 2승4패, 안국현은 1승6패에 그쳤다. 김동호와 진시영이 각각 3승4패, 조혜연이 1승1패로 그런대로 제 몫을 하고 있고 락스타리그 맴버 김현찬도 2승3패로 기대 이상이지만 선수들끼리 승부호흡이 맞지 않는지 집중타가 터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특히 6라운드 Kixx와의 경기서 안국현이 상대팀 주장 박영훈을 거의 다 잡아 놓고서 막판에 아쉽게 역전패 한 것이나 7라운드 포스코LED와의 경기서 김동호와 조혜연이 선전했는데 상위 지명자들이 모두 지는 바람에 결국 2대3으로 패배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다음은 윤 감독과 일문일답.
-정말 승운이 따르지 않는 것 같다.
"특별히 바둑이 안 될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나쁘니 저 뿐 아니라 선수들 모두 고민이 많다. 다음 경기에는 오더를 어떻게 짜야 할까, 팀원들 컨디션은 어떤지 등등 바둑리그 생각에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체중도 꽤 줄었다."
-연패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오더가 잘못됐나.
"오더 자체는 그렇게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아요. 오히려 대체로 만족스런 편이었죠. 선수들도 연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부담이 됐는지 최근에는 승리를 서두르다 다 이긴 바둑을 어이 없이 지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지난 2일 오후 5시부터 주장 최철한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새 신랑이 신혼여행도 미루고 바로 대국장으로 달려와 9시 대국에 출전해 화제가 됐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이런 저런 말들이 있었다. 7라운드 경기 오더 제출 전에 최철한과 출전 여부를 의논 했는데 6라운드에서도 중국 리그 때문에 오더에서 빠졌는데 팀 성적도 나쁜 상황에서 주장이 2주 연속 쉴 수는 없다며 반드시 시합에 나가겠다고 하더라. 신부(윤지희 3단)도 강력히 출전을 권했다더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리였던 것 같다."(최철한은 그날 호텔에서 1박하고 다음날 태국 푸켓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팀웍을 다지는 묘책이라도 준비하고 있나.
"사실 특별한 묘안이 없다. 바둑리그가 단체전이긴 하지만 선수들 개개인의 대국 스케줄이 워낙 바빠서 시합 때 빼고는 팀원들이 같이 한 자리에 모이기가 무척 어렵다. 원래 휴식기간 중에 간단히 MT라도 갈까 했는데 도저히 일정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대신 7월초에 2박3일간 제주도로 전지훈련을 갈 계획이다. 휴식기간 중 주장 최철한이 신혼생활에 잘 적응해 컨디션을 회복하고 2지명 안국현도 슬럼프에서 벗어나 팀의 든든한 허리역할을 잘 해주기를 기대한다."
윤 감독은 1974년 생으로 89년 입단, 93년에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준우승 했다. 동양증권배 명인전 국수전 등 각종 국내외 기전 본선에서 활약했고 2002년에는 농심배 한국대표로 출전해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2007년 9단으로 승단했다. 바둑계에 소문난 만능 스포츠맨으로 프로기사 야구팀의 주전 멤버로 활약하고 있으며 TV해설자로도 인기가 높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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