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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3> 국립묘지 - 불멸하는 정신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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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3> 국립묘지 - 불멸하는 정신의 공간

입력
2012.06.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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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전 9시 30분, 대전 국립현충원 묘역. 사자(死者)들의 점호가 시작됐다. 한 위 한 위 관등성명이 확성기를 통해 낭독되는 동안, 바람 없는 6월의 첫 햇살 아래 적막하던 320여㎡(약 97만 평)의 묘역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군데군데 땅이 꿈틀 일어서는 듯했다. 호국보훈의 달. 국가보훈처가 벌인 '전사자 호명(Roll-Cal)l'행사다. 창군 이래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사한 4만5,000여 위의 군별 계급 성명을 유가족과 자원봉사자들이 호명할 때마다 200인치의 대형 LED 전광판에는 명단들이 번쩍 떴다 스러져갔다. 잊지 않았다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후손들의 이 행사는 현충일인 6일까지, 하늘나라로 부치는 엽서쓰기 등 다양한 부대행사와 함께 이어졌다.

묘역은 엄숙한 공간이다. 가지런하게 조성된 곳이든, 비탈 따라 분방하게 선 곳이든 사자들의 공간은 어디나 성역(聖域)이다. 이 말은 모든 주검은 성스러운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러 외신이나 신문의 사회면에 혼이 떠난 육신에 참담한 짓을 범한 이들의 사례가 소개될 때도 있지만 고인의 생전 행적에 대한 분노나 원한으로 하여 죽음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이들, 혹은 종교적 신념이나 사적인 이해에 스스로 제 넋을 내팽개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주검은 온전한 형이상학적 주검이 아니라 행위나 가치가 대상화한 물질일 뿐이다. 부검의가 메스를 들 때 마주하는 주검 역시, 생시의 삶의 의미보다 절명 과정의 내력을 밝혀줄 직접적인 증거자료라는 의미가 우선한다는 점에서 우선은 물질적이다. 추억되는 주검의 공간은, 그 곳이 묘지이든 영안실이든 주검의 상징과 추억이 밴 마음 깊은 한 자리이든, 정신의 나풀거리는 깃들까지 여미게 한다.

그리고, 국립묘지는 국가가 정하고 국민이 동의한 성역이다. 거기 깃들인 주검들은 국가와 국민의 약속 위에서 불멸성을 획득한 정신들이다. 가지런하게 평토된 드넓은 공간 위에 끝없이 일사불란하게 방사상으로 확산되며 선 묘비들은 다소 불편한 용어이긴 하지만 수잔 손탁이 명명한 '파시즘 미학'의 한 극단을 구현한다. 인내, 집단의 매스(mass)화, 사물의 증대와 복제…. 좌우대칭의 완벽한 조화가 주는 정연함과 웅장함, 소실점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묘비들의 깊이감은 미학적 숭고함을 이념이나 종교의 차원, 요컨대 어떤 정신으로 고양시키는 듯하다.

그 위에 '잊지 않겠다'는 정신의 목적어가 선다. 애국애족, 호국보훈, 자유민주주의…. 국립묘지의 영들은 그렇게, 전역(轉役) 없이 봉사해왔고, 복역하고 있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현충탑 오석 평판 제단에 새겨진 헌시(노산 이은상이 짓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가 염원하듯,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는 한.

국립묘지는 한 국가와 민족(혹은 국민)이 탄생하고 변천해오는 동안 겪은 가장 상징적이고 격렬한 시간들을 응축하고 있다. 또 그 국가나 민족이 지탱해 온 이념이나 철학 혹은 가치들이 가장 간결하고 결연하게 농축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국회의사당이나 대법원, 국가 최고지도자의 공관이 누릴 수 없는, 거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엄으로 우뚝하다. 우리 경우에도 모든 공직자들이, 심지어 달갑지 않을 이념적 혐의에 시달려온 역대 야당 대표들조차, 취임 직후 국립묘지에 분향해온 것은 스스로 정신의 적통임을 인정받고, 그 권위와 위엄의 후광으로 혐의의 짐을 덜고자 한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줄곧 '국가' '민족'이라고 썼지만, '국립묘지'의 가치에 대한 각성은 근대 국가 이전, 멀리 신화의 시절에도 있었던 듯하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많이 인용되는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조사(弔辭)'의 한 구절.

"이분들은 공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그 대가로 자신들을 위해 불멸의 명성과 가장 영광스러운 무덤을 받았습니다. 이분들의 유골이 안치될 무덤이 아니라, 그럴 기회가 날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영원히 추모되기 위해 이분들의 명성이 자리잡고 있을 무덤 말입니다. 온 세상이 탁월한 사람들의 무덤입니다. 고향 땅에 세운 비문만이 이분들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땅에서도 이분들에 대한 기억은 기념비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탁월한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말은, '유골이 안치될 무덤'이 지닌 불멸의 명성과 영광은 공간의 경계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무덤=명성, 영광이라는 의미다. 페리클레스는 그 정신의 확산 비용, 즉 장례식 비용과 "이분들의 자녀를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부양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연설을 맺는다.

국립묘지의 풍경 역시 시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2006년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이 시행되면서 묘판의 구획과 면적 차등이 완화됐다. 종전 법령은 국가원수와 장군, 장교, 사병 등을 신분과 계급에 따라 묘역을 구분토록 했고, 묘판 면적 역시 대통령 80평, 장군묘역 8평 등으로 엄격한 우열의 질서 위에 조성토록 했다. 그것이 장군 옆에 이등병이 나란히 한 평 공간을 차지하도록 바뀐 것이다. 아직 완벽하게 평등한 공간은 아닌 것이, 지금도 국가원수는 80평이고, 3부 요인과 국무회의 의결 등을 통해 승인된 시신매장자의 경우 8평형을 얻는다. 또 이미 조성된 묘판은 종전 법령을 따른다는 적용례(부칙 3조)에 따라, 장군용 묘판은 아직 약 280기(총 700기)가 남았고, 애국지사 묘판도 100기(총 3,000기) 정도 여유가 있다고 한다.

우리의 국립묘지는 현재 모두 8곳. 서울과 대전 국립현충원과 3ㆍ15, 4ㆍ19, 5ㆍ18민주묘지, 경북 영천과 전북 임실, 경기 이천의 호국원이다. 서울현충원은 국빈행사의 의전 및 경호 편의를 명분으로 국방부가 여전히 관할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관리 주체가 국방부, 민주묘지(지방자치단체) 호국원(재향군인회)에서 국가보훈처로 일원화됐다. 동일한 국립묘지법에 의해 관리되면서 모두 '국립묘지'로 통칭되고 있는 저 8곳에 총 32만893위(위패 포함, 2011년말 현재)가 모여 있다.

AD 2세기경 로마의 속국이던 카르타고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참회록에 "너희에 의해 뿌려진 기독교인의 피는 우리를 번성하게 할 씨앗이 될 것" 이라고 썼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1787년 어떤 편지에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라고 썼다. 대충 옮기자면,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써 거듭난다는 의미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구호처럼, 다짐처럼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이 말을 빛 바랜 어록집에 가둬두기에는 이른 듯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저 유서 깊은 말의 내력을 보건대 어쩌면 저 비유는, 시대에 따라 주어와 표현이야 조금씩 변주되겠지만, 젊은 영혼의 영원한 화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저 말을 사이에 두고 화자와 청자로 만나 피로 맞섰던 이들이 국립묘지라는 불멸의 정신 공간 위에 나란히 누워있다. 따라서 그들이 구현하고, 우리가 받드는 정신이 하나로 간결하고 결연하다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공존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4ㆍ19 민주묘역의 323위와 3ㆍ15묘역의 33위 그리고 광주 망월동 5ㆍ18묘역의 658위(4월30일 현재)가 현충원 등 나머지 묘역의 널따란 묘판 아래 누운 어떤 이들과 결코 한마음일 수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국립묘지에 묻힌 내력을 두고 불편한 뒷말을 나누고, 야당의 한 국회의원 당선자가 라디오 방송에서 "현충원 참배식 권유는 부당한 강요가 될 수 있다"고 한 말을 두고 세상 한 켠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인정하는지 부인하는지" 답하라며 야멸차게 추궁한 것도 불과 며칠 전이다.

종교적 자유의 갈망이든, 제국주의에 맞선 자결ㆍ자유의 요구든, 독재에 항거한 민주주의의 추구든, 그것이 휴머니즘의 근본적 가치 위에 서는 한 우리는 흔쾌히 동의한다. 다만 저 웅장한 개념어들을 누가 어떤 맥락에서 쓰는지에 따라 그 의미 역시 불편한 진폭으로 출렁이기 마련이라는 것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정연한 질서 위에 광활한 저 푸른 언덕이 공동체의 마음 안에서 정신의 불멸성으로 조금의 유예도 없이 수용되려면 더 긴 세월, 어쩌면 더 많은 안타까운 피가 필요할지도 몰라, 우러러보기 두려워질 때도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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