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구성원들은 정책, 계급, 지역, 이념으로 갈라져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닫는다. 갈등을 통합해야 할 정치, 언론, 지식인들은 도리어 이를 부채질한다. 극단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중도의 역할은 간절해진다.
이념보다 인간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연구해 온 박명림(49)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교수와 진보적 법학자의 시각으로 국가권력과 인권, 평화의 문제를 성찰해 온 김두식(45)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일보 창간 58주년을 맞아 극단주의와 비이성의 시대를 넘어설 중도의 역할을 논했다. 1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두 교수는 "보수와 진보 모두 진영논리에 매몰돼 나라를 두 개로 쪼개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진단한 뒤 "중도의 회복은 곧 이성의 회복이자 시민의 발견"이라고 입을 모았다.
_중도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중도란 무엇인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스스로는 중도라고 여기는지.
김두식 교수= 어젯밤 무척 고민했다. 스스로 중도 성향은 맞지만 왼쪽으로 더 가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사는 중도다. 법률가의 한계일 수 있다. 우리 세대 법률가들은 대체로 표현의 자유 등 자유권적 기본권을 위주로 훈련을 받았다. 18세기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에서 논의된 자유권적인 기본권이 침해되면 법률가는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노동자 권리, 비정규직, 복지,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같은 것이 거론되면 한계를 보인다.
박 교수= 중도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관념으로서 중도는 기계적인 중간ㆍ평균을 떠올리지만, 시대정신으로서의 중도는 공정ㆍ중용ㆍ형평을 추구해왔다. 현실사회의 문제를 바르게 짚어주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공정이고 중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극단은 서로 간에도 대립하지만 중용과도 대립한다. 그는 "비겁한 사람은 용감한 사람을 무모하다고 몰아가고, 무모한 사람은 용감한 사람을 비겁하다고 몰아간다"고 말한다. 중용은 무모와 비겁, 둘의 타협이 아니라 용감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좀 더 개혁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중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공동체를 추구하나 기득권세력과도 대화해야만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강고한 진영논리에 갇혀 한 쪽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다른 쪽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이념, 자기진영, 자기논리의 포로가 돼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 전에 어떤 진영인가를 먼저 묻는다. 같은 진영이면 틀린 말도 지지하고, 다른 진영이면 옳은 말에도 귀를 닫는다. 외국 학자들은 북한과 진보남한, 보수남한이라는 3개의 한국이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기는 쉽다. 하지만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진보이지만 또한 진보가 아니다.
_우리 사회엔 분명 이처럼 진영논리에 매몰된 양쪽을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목소리가 높지 않을 뿐이다. 이런 낮은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대변할 정당이 필요한 것일까.
박 교수= 막스 베버는 "위대한 용기는 위대한 기회주의자"라고 했다. 이념과 진영을 넘어 진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정당이든 학문이든 종교든 목소리가 크고 극단적이어야 주목 받는다. 그러한 선명성은 선정성이자 몽매성, 천박성의 표현일 뿐이다. 진정한 용기는 극단주의에 맞서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권 민주주의 평등 자유를 지지한 조봉암 함석헌 김수환 김준엽 선생 같은 분들은 독재와 타협하지 않고 기본퓽?중시했지만 결코 극단주의로 가지 않았다.
김 교수= 중도적인 정당이 나올 필요가 있을까? 이미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에 중도적 인물이 충분하므로 그 분들 역할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아고라든 아크로폴리스든 좌우가 같이 말을 나눌 공간이다. 보수는 현실만, 진보는 이상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이 광장에 모여 얘기를 나눠야 한다. 우리에겐 광장이 없고 판이 살벌해 합리적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은 빠져나가고 자칭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검투사들만 싸움을 계속한다. 이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싸우는 동안 다수는 열광하는 관중 노릇을 한다. 예를 들어 TV '100분 토론'이 끝나면 인터넷 등에 "누가 누구를 발랐다"는 말만 올라온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까요"라는 대안논의는 어렵다. 결국 가장 시급한 일은 대화 공간의 회복이다.
박 교수= 중도는 언제나 존재하나 찾지 않고,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중도란 실체가 아닌 방법이다. 사실 인간 삶의 모든 문제는 여러 가치와 정책들의 중간 어디엔가 존재한다. 좌우 극단주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좌파와 우파는 서로 상대 주장의 가장 오른 쪽과 가장 왼 쪽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데,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현되는 가치는 좌우 극단을 제외한 영역에서 선택된다. 중도의 회복이 이성의 회복이자 대안의 회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영논리는 대안적 선택을 막아버려 우리 삶을 더욱 핍진하게 만들 뿐이다. 그 피해자는 결국 대안을 상실한 시민 일반, 특히 하층민이다. 중용의 회복은 삶의 가능성과 대안의 풍성함을 함께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_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진보와 보수 모두의 문제다.
박 교수= 한국 진보는 민주 평등 진보 평화를 주장하면 그 말이 곧 실체인 줄 안다.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말을 통해 실제로 그런 사회를 만들었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의 진보정부들은 보수정부와 다른 구체적인 삶의 조건과 질을 제공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공적인 정책과 담론이 사적인 안정과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공공성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공공성은 곧 개인성인 것이다. 진보는 이 점을 놓쳤다.
반면 한국의 보수에는 인간적 윤리와 가치가 결여돼 있다.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은 중요하다. 한국사회는 분명 잘 살게 됐다. 그런데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출산율은 꼴찌이다. 부패, 형평성, 복지, 공공성 역시 OECD 바닥이다. "우리는 왜 잘 살고자 했는가?"는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한다. 한국은 10대 재벌이 국내총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기업 금융 로펌 유통 언론 학교 등 주요 영역이 모두 3,4개가 장악해 이 과두집단이 보수 담론을 유포한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김 교수= 우리나라 진보는 보수와 그 지지세력을 너무 우습게 본다. 흔히 진보에는 "무식해서 보수가 됐을 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얼마나 나쁜지 알리기만 한다면 다 진보로 돌아설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보수적인 분들은 대부분 박정희를 몸으로 겪은 세대이고,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가르치려 드니 보수파들은 재수없다고 생각한다.
중도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수나 진보가 설득해야 할 대상인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조금만 의문을 제기하면 진보 논객들이 '무식한 놈, 기본이 안 된 놈'으로 취급해 배제한다. 중요한 설득의 대상을 배제하고 무시한다. 대화의 장 자체도 사라졌지만 대화 상대를 무시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박 교수= 정당의 성명이나 언론의 사설 칼럼조차 과연 공적 의사소통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박하다. 좌파나 우파의 정치인 학자 종교인 언론인이기 이전에 정말 정치인 학자 종교인 언론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언론인으로 30년 훈련받고 이런 천박한 논설을 썼나, 40년 종교활동을 하고 이런 공격적인 설교를 하나 싶을 정도로 적의를 품은 언어의 천박성이 너무 심하다.
김 교수= 천박해지는 주요 원인이 늘 같은 편만 만나기 때문이다. 밥도 같은 편끼리만 먹는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하고 얘기하면 편하니까. 그러다 보니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 못해 증오가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극단적인 이야기를 퍼부으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지역주의까지 가세한다. 경상도면 무조건 보수, 전라도면 무조건 진보라는 게 말이 되나? 어느 정당에 가면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어, 다른 정당에 가면 전라도 사투리가 표준어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다 보니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경상도에 살다 보면 "김대중 정권 때 경상도 양어장을 다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진실처럼 유통되는 걸 듣게 된다. 이상한 얘기가 걸러질 기회가 없다.
_역사적으로 분단 현실이 극단적 이념 대립?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도 사회 통합에 발목을 잡는 것일까? 최근에도 '종북좌파 의원의 국회 입성' 논란이 거세다.
김 교수=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에 대해선 국회에 들어가든 못 들어가든 이미 정리됐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다른 정당들이 나서서 못 들어오게 막는 것도 이상하다. 당내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들이 '종북좌파이기 때문에' 국회에 들어가는 걸 막아야 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 기본 절차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박 교수= 극소수만이 추종하는 종북주의는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했다. 현재의 종북 논란은 과잉담론이라고 본다. 그보다 부정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이 헌법기관인 국회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 3·15 부정선거보다 더한 부정을 저지르고도 총체적 부정이 아니라는 구당권파는 반(反)민주적-친(親)전체주의적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발상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진보도, 민주주의자도 아니다.
북한 때문에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이 심화한다는 분석은 냉전과 권위주의 시대에는 맞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국력, 가치, 정통성에서 남북 간 경쟁은 끝났다. 국내 정치에 북풍이 영향을 미치던 시절도 지났다. 보수든 진보든 북한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 인정한다. 다만 2,3가지 문제가 남는데 보수와 진보가 역전 현상을 보이는 것이 있다. 남한 인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보수 세력이 북한에 대해서는 인권의 전사가 된다든지,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선 보편 논리로 비판하는 진보 세력이 북한에 대해서는 내재적 시각을 용인하는 식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해 평가를 한다면.
김 교수= 이명박 정부에 대해 정말 안타까운 것은 국가가 이 정도까지 발전했으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 기본권 문제를 일으킨 점이다. 'PD수첩' 제작진이나 '미네르바'에 대한 사법처리, 정연주 KBS 사장을 몰아낸 것 등이 그런 문제다. 인권에 대해 이 대통령은 반(反)인권이 아닌 무(無)인권,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생각이 없으면 이전 정부의 기조를 이어가면 되는데 무리하게 '기계적 중립' 아젠다를 이끌려다 패착이 됐다. 이런 문제 없이 중도의 마음을 샀더라면 보수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았으리라 본다. 표현의 자유를 건드려 중도가 등을 돌렸고, 진보 세력이 힘을 얻게 됐다.
박 교수= 민주화 이후 보수정부 2번, 진보정부 2번을 겪었다. 즉 이명박 정부는 둘 모두의 한계를 배워서 넘을 수 있는 조건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 반공성전주의, 시장만능주의가 결합돼 노태우, 김영삼 정부보다 더 보수적으로 되돌아갔다. 특히 기업ㆍ경쟁ㆍ금전 만능주의를 과도하게 추구해 국민안전 공공성 호혜 연대와 같은 사회의 공통가치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민주화시대 이후 여러 호조건에서 출발한 보수정부가 이렇게 심각한 이념논리 진영논리 시장논리에 빠져들 필요가 있었는지 안타깝다. 양자택일 논리가 족쇄로 작용해 정책선택의 폭을 닫아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다음 정권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일까.
박 교수= 보수와 진보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됐다. 인간적인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 파당적 이해를 넘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보수는 성장과 안보를 중시하고 진보는 평등과 복지를 중시하는데, 이런 이분법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의 '삶의 조건'은 이미 선진국가다. 도시화, 사회간접자본, 정보화, IT 조선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이 세계 최선두권이다. 그러나 '삶의 질'은 OECD 최악 수준이다. 자살률, 출산율, 행복지수, 비정규직과 자영업 비중 및 임금격차, 남녀 임금격차, 여성 사회진출, 정부의 공공복지 비율 등이 그렇다. 우리가 '삶의 조건'을 발전시키는 이유는 '삶의 질'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아닌가. 가장 발달된 '삶의 조건'과 가장 고르지 않은 '삶의 질'이 병존하는 이 세계적인 예외상태는 끝내야 한다. 21세기 변종 공동체, 변종 괴물인 한국 사회를 민주주의를 통해 인간적인 공동체로 만들려는 절실함이 다음 정부의 핵심기치가 되어야 한다. 모두의 성찰과 간절함이 요구된다.
김 교수= 남의 말을 전혀 안 듣는 구조에서는 다음 시대를 향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보수파는 진보가 북한과 손을 잡았다고 몰아붙이거나, 입만 살아있고 실천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배제한다. 진보파는 정부 전체에서 일하는 사람을 밥만 먹으면 나라를 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시민들도 다음 돌을 누구에게 던질 것인가 하며 사냥질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의 말을 듣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정책을 얘기하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복지 담론이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는데, 보수든 진보든 다음 정부에서는 그걸 구체화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를 짊어지게 됐다.
_중도를 복원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특히 언론의 역할도 중요한데.
김 교수= 쉽지 않은 것이 가령 보수는 '종북 좌파'를 입에 달고 산다. 내가 보기에 주사파를 비롯해 친북적 성향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도 대세에 전혀 영향이 없는데, 가장 써먹기 좋은 이야기니까 이 부분만 때린다. 무조건 처벌하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자유롭게 말하도록 놔두고 국민들이 '너무 이상한' 그들을 선택 안 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반면 진보 쪽은 변절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다. 보수와 타협하고자 하면 "변절했다"며 냉혹하게 버림 받는다. 그렇게 버림 받은 사람들이 보수의 품에 안기면 "그것 보라"며 다시 비난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보수 쪽의 합리적인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 해도 그런 결과로 이어질까 봐 무서워서 못 한다.
박 교수= 사회의 분열이 가치분열로 나아가면 붕괴위험에 직면한다. 국가라는 틀만 있을 뿐 마음 속에서는 두 국민, 두 국가가 된다. 특히 역사적으로 극단주의가 판치는 시기에 언론 지식 종교가 극단적 담론창출에 앞장서고 기득세력에 복무했다. 언론 학문 종교는 다양한 다른 요구들을 매개하고 반영해서 공공정책으로 연결해주는 이 공공의 영역이며, 여기에서 염치와 균형의 회복이 절실하다. 이러한 공공영역과 정치에서 일반 시민의 삶이 직면한 위기를 직시한다면 중도의 복원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언론에 대해서도 '공준(公準·사회 공동의 준거)'을 요구하고 싶다. 정당은 표를 얻기 위해 중도 흉내라도 내는데, 언론 사설은 더 극단적이고 섬뜩하다. 소음은 많으나 죽비소리는 없다. 종교가 사람들을 종교적이지 못하게 하고, 정치가 사람들의 참여를 막듯, 언론이 사람들의 소통을 막고 있다. 중도의 발견은 시민의 발견이고, 시민이 발언할 수 있는 공적 공간으로서의 언론이 돼야 한다.
김 교수= 지식인들이 장(場)이 없어진 것을 불평만 할 수는 없다. 용기가 없었던 것에 대해 먼저 반성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정의가 무엇인지 늘 불분명한 상황에서 언론이 기계적 중립만 지키다 보면 결국 기득권층의 이익만 옹호하게 된다. 그래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의심스러울 때는 자유의 이익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누가 강자인지의 논쟁은 따로 벌이되, 약자 중심의 프레임을 갖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 아닐까.
정리=이왕구기자 fab4@hk.co.kr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진행=김희원 차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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