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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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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50>

입력
2012.06.0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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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과목에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이 있으니, 제술 과목은 시(詩), 부(賦), 송(頌), 책(策)이 있어 나라를 경영하는 현실에 비겨서 자신의 생각을 논하는 책(策)이 중요했건만 통상 과거 출제는 언제나 시부(詩賦)였고 그것도 스스로의 창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고전의 틀에 얽매인 낡은 것들이었다. 과거에서는 기예를 통하여 인재를 시험하나 그 문장이란 것이 위로는 조정의 관각(館閣)에도 쓸 수 없고, 임금의 자문에도 응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사실을 기록하거나 인간의 성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불가능한 문체였다. 어린아이 때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하여 머리가 허옇게 된 때에 과거에 급제하면 그날로 그 문장을 팽개쳐버렸다. 한평생의 정기와 알맹이를 과거 문장 익히는 데 전부 소진하였으나 정작 나라에서는 그 재주를 쓸 곳이 없다고 하였다. 서일수가 이러한 제도의 부패한 폐단에 대하여는 내일 직접 보라고 하면서 신통에게 일렀다.

내가 과장을 직접 경험하도록 해줄 테니 이번에 조카는 깊이 생각하기 바라네.

어쨌든 이신통은 서일수와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 뒤에 더욱 가까워졌다. 식년시 개시 하루 전날인 삼월 열이틀 날에 이신통은 서일수가 이끄는 대로 오후 느지막이 배오개로 나갔다. 오늘은 윤 씨네 연초전에 가는 길이 아니었고 그동안 두 차례나 언패 낭독을 했었다. 배오개에서 누렁다리(黃橋) 쪽으로 가는 방향에 지전(紙廛)이 줄지어 있었으니 종루의 육조 부근을 빼고는 제일 많이 모인 곳이었다. 벌써 일대는 의관이 번듯한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있었고 보통 때에는 행상꾼이 종루 큰길에만 보였는데 입전처럼 호객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들이 지전 앞길로 들어서니 떠꺼머리총각 녀석이 서성거리다가 먼저 나이 지긋한 서일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시지(試紙) 보러 나오셨지요? 저희가 서수(書手)며 거벽(巨擘)을 다 붙여 드리구요 접도 꾸려 드립니다.

신통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서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각에게 말했다.

허, 우리가 바로 거벽이오, 서수다. 누구 마땅한 거자를 소개해주겠느냐?

그러세요? 저희 주인께 물으시면 잘 조처를 해드릴 겁니다.

그들이 지전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종이와 문방구가 진열되어 있고 주인은 점방 안쪽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시지 찾으시죠? 영남지와 완산지, 남원지가 다 있구요. 정지, 간지, 주지, 유둔지, 백로지, 죽청지, 특히 시지로 쓸 아주 좋은 장지로 경면지가 있습니다.

여기 서수와 대작(代作)을 쓴다구 해서 들여다보았소.

처음 뵙는데 누구 소개이온지……

주인장이 알아서 하시구료.

지전 주인은 서일수와 신통에게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상대하던 선비들에게 돌아앉았다.

자아 그러니까, 서수가 두 사람 필요하구요, 접도 두 접이 필요하시다니 구종배가 적어도 여섯은 있어야 되겠습죠. 잘 알았습니다. 내일 새벽 인시 초에 여기루 오시면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겁니다.

선비들 셋이 뒤도 안 보고 나간 다음에야 주인은 다시 두 사람을 상대했다. 우선 두껍고 질이 낮은 종이 한 장을 펼쳐내더니 먹을 갈았다. 벼루에 먹물이 고이자 필통을 집어다 옆에 놓고는 다소곳이 기다렸다. 서일수가 붓을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 일필휘지로 내려썼다.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계절을 아는 좋은 비라

한 봄을 맞아 내리는구나!

바람 타고 남몰래 야밤에 오는 봄비

세상 만물 적셔도 소리는 전혀 없네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 첫 구절이었다. 서일수가 그만 붓을 내려놓고 신통을 돌아보니 그가 붓을 잡아 찬찬히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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