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삼청동에서부터 광화문을 거쳐 대한문까지를 설렁설렁 걸었다. 삼청동 골목은 데이트족과 관광객으로 북적댔고, 광화문 광장에서는 '해고기자를 살려내라'는 피켓을 든 방송인의 1인 시위가 있었고, 금연 캠페인을 벌이는 천막이 있었고, 잔디밭에 나란히 누운 연인들이 있었고, 시원하게 솟구치는 바닥분수에선 아이들이 옷을 흠뻑 젖어가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대한문 앞 한쪽에선 쌍용 해고 노동자들의 분향소가 있었다. 한 거리에 모여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의 너무 다른 사람풍경을 한 거리에서 목격해서 마음이 신산했다.
먹고 사는 일에서, 우리가 그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짚어보아야 할 것으로 나는 '휴식'을 꼽겠다. 어떤 휴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일까. 어쨌거나 휴식에 대한 고민은 삶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고민 때문에, 서울시도 광화문광장을 만들어 우리에게 질 좋은 휴식을 취하라며 선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선물은 아무래도 탐탁지가 않다.
휴일, 거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너무 비슷하다. 회사에서나 학교에서 획일화된 시스템에 갇혀 우울해진 영혼을 햇볕 아래 보송보송 말리기 위해 나온 거리에서, 우리는 또다른 의미의 시스템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광화문 광장은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한 디자인으로 채워져 있다. 좋게 표현하면 너무 친절한 디자인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휴식의 형태를 얼마간 강요하는 디자인이다. 어제에 그곳을 다녀갔던 사람이 했던 방식 그대로를 기계처럼 똑같이 되풀이하도록 설계돼 있다. 광장이라는 것은 텅 비어 있을 때에 오히려 쓸모가 다양해진다. 사실, 광장은 텅 비어있어야 맞다. 텅 비어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곳에 내용을 채우게 된다. 내용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제도 속에서 쥐 죽은 듯이 보냈던 평일의 얼굴과는 다른 얼굴로, 나를 나타내고 드러내는 것으로 휴일을 보낼 수도 있다. 잔디밭과 세종대왕 동상과 바닥분수 시설로 이어진 그곳을 걷다 보니, 주입식 교육 제도 아래에서 사지선다형 문제를 풀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어쩐지 작위의 길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씁쓸함이 있었다. 이곳이 텅 비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보았다. 우리가 우리의 다양한 욕구로 이 공간을 다양하게 채워갔을 것이다.
대한문 앞 쌍용 노동자의 분향소를 지나며, 그 옆에 차려진 작은 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뒤적였고 그리고 서명을 했고 분향을 했다. 광화문에서 대한문까지, 시민들의 발걸음을 가장 질 좋은 방식으로 배려한 공간은 분향소 옆에 차려진 작은 도서관이었다. 거기에 책이 있어 조문을 하러 왔다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못하는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조금더 머물 수가 있다. 분향소를 지키며 오랜 투쟁을 해야 하는 유가족들이 읽을 수도 있고, 지나가는 시민 누구나가 읽을 수도 있다. '강요된 함께'가 아니라, 책이 매개되어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공간. 나는 거기서 쪼그리고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며 조금더 그곳에 머물렀다.
시청에서 버스를 타고 홍대 앞으로 옮겨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홍대앞도 갖은 유흥업소들로 몸살을 앓은 지 오래된 곳이지만, 골목 모퉁이만 돌면 뜻밖의 내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아름 모인 젊은이들이 길바닥에 펼쳐놓고 벌이는 벼룩시장을 기웃거렸고, 휴대용 엠프를 앞에 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무명가수에게 박수를 보냈고, 커피를 팔면서 동시에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문화 카페, 벽들을 온통 책으로 채워놓은 북카페 들을 구경했다. 서울시가 시민에게 제공하는 수직적인 문화가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이 나누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드는 수평적 문화. 대단한 시설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여가를 타인의 여가와 소통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비로소 자신의 색깔로 거리를 디자인하는, 진짜 거리의 주인들을 만난 것 같았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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