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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소리 내어 읽기에서 배운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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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소리 내어 읽기에서 배운 지혜

입력
2012.06.0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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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새 아무 생각 없이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글자를 그림처럼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얼 읽고 있는 거지? 어디까지 읽었더라?' 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평소에도 책을 좋아했지만, 몇 년 전 헌책방 일을 시작하면서 더 열심히 읽겠다고 다짐한 것이 탈일수도 있다. 처음엔 그저 열심히 읽는 것에 집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누구보다 많이 읽겠다거나 빨리 읽겠다는 욕심이 커진다. 어떤 사람이 책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혹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책이라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때론 화가 났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책 읽는 것이 점점 고통이 되었다. 무엇보다 즐거워야 할 일인데도 오랫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매일 쏟아지는 새 책들, 신문과 텔레비전 같은 매체를 통해서 들리는 책 소식을 보면 즐거움 보다는 무서움이 먼저였다. '저 많은 걸 다 읽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못 읽고 놓치는 책 중에서 정말 내가 읽어야 할 책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더 이상 책을 못 읽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도 끝도 없이 쏟아지는 책 - 아마도 내가 죽은 후에도 책은 여전히 나올 것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그 수많은 책들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은 나를 무척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때, 그럴 때는 생각을 반대쪽에서부터 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내가 감당 할 수도 없이 매일 내 쪽으로 쏟아져 나오는 괴물 같은 책을 어떻게 빨리 읽을 것인가? 그건 마치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는 컴퓨터 게임처럼 몸과 마음을 옭아맨다. 그 반대쪽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빨리' 읽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나는 '적은 것'을 '느리게' 읽어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빨리빨리 눈으로 읽던 것을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읽는다. 열 권 읽을 시간에 한 권을 읽는다. 거기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지혜는 소박하고 볼품없이 아무 곳에나 피어있는 들꽃과 같다. 욕심은 화려한 공작 꽁지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책 욕심은 더 그렇다. 사람들은 때로 그것이 욕심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채 책을 읽고, 그것을 기억했다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불쑥 꺼낸다. 자기 몸을 책이라는 갑옷으로 꽁꽁 싸매 무장하고 두 눈만 겨우 보이게 둔다. 책은 그의 방어막이 되고 무기로 돌변한다. 그때부터 자기는 없고 책으로 쌓아 만든 바벨탑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혜는 위에 있지 않고 가장 낮은 곳, 땅바닥에 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무릎을 꿇고 간신히 피어있는 작은 꽃을 보지 못하면 지혜는 찾을 수 없다.

나는 한 발짝 더 나가 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시간을 정해서 책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기로 했다. 무조건 빨리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하려 애쓰는 것에 익숙했던 내게 소리 내어 읽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얻은 것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 책 한 권을 알차게 읽으면 그 안에서 수 백 가지 지혜를 얻는다. 빨리 읽고 치우면 겉모양만 알 뿐이다.

바르게 앉아서 또박또박 글자를 읽어보니 우리 옛 선비들이 왜 그렇게 소리 내어 책을 읽었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한글은 입모양부터 발성기관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서 만든 소리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를 소리 내어 읽을 때 더 이해가 잘 되고 문장에서 감칠맛이 난다. 그렇게 눈과 입과 귀로 익힌 책은 단순히 책 속에 있는 지식을 아는 것 이상으로 많은 느낌을 함께 선물한다. 꽃과 곤충을 사진으로만 배운 사람은 그것을 지식으로 알뿐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어렸을 때 그런 책을 본 일이 없지만 날마다 산과 들로 다니면서 꽃을 만지고, 냄새 맡고, 따먹었으며 곤충과 함께 뛰어다녔다. 여전히 내게는 꽃 이름과 곤충의 학명이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부터 배운 지혜가 더 좋다는 걸 안다.

요즘에는 더구나 어린아이들에게도 책을 경쟁적으로 읽힌다. 아이들에게 무턱대고 수십 권씩 하는 전질을 턱하니 안겨준다. 초등학교에선 누가 책을 더 많이 읽는지 경쟁을 붙여서 상을 준다. 아무리 경쟁이 요즘 사회 분위기라고 하지만 책 읽는 것만큼은 경쟁하지 않아야 한다. 책 읽기는 공부가 아니라 겸손한 지혜를 배우는 느릿한 삶의 호흡이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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