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권문세가라 해봤자 십여 가문에서 스물이 채 못 되는 터에 그들이 돌아가며 차지하도록 정해져 있지 않은가. 하찮은 무과라도 그들 집안에 줄이 닿지 않으면 뽑힐 수가 없다네.
서일수는 이제는 웃지 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신통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글 읽은 선비로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다고 하였겠다?
이신통은 집에서 나올 적의 마음 그대로라 다른 생각 없이 순진하게 대꾸했다.
시부와 책문에 대한 예습은 소싯적부터 해오던 공부라 한번 시험해보고자 하였지요.
그저 고향 사람들에게 과거를 보러 서울에 다녀왔노라 체면이나 세우자는 게 아니면, 문과를 치를 신분이 못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니던가?
이신통은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저절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았다가 신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칠패로 나가 탁주라도 한 잔 하십시다.
서일수는 신통의 제안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눈을 크게 뜨고 자기들 처소를 두리번거리다가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나섰다. 신통이 칠패로 들어서는 초입에 이르러 아무 집이나 목로에 들어서니 저녁밥 참이라 한산했다. 좌판 앞에 서서 술 두 사발 시켜놓고 신통은 단숨에 쭉 들이켰고 서일수는 한 모금 마시고는 기다리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서얼(庶孼)입니다.
서일수는 놀라지 않고 말없이 술을 비울 뿐이었다. 신통이 한 잔씩 더 시키고는 말했다.
달리 공명심은 없으나, 제가 그런 신분으로 태어난 줄 모르던 때부터 글공부를 하였으니 과장에라도 한번 참례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서일수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는 눈치더니 말을 꺼냈다.
나는 하천(下賤)인 불승이었네. 중 행색이었다면 도성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걸세. 나중에 언제 내 얘기를 해주겠지만 선대에 사정이 있어서 구몰된 집안 사람일세. 나도 진작부터 벼슬을 하자고 글을 읽은 사람은 아니라서 그냥 세상사를 구경꾼처럼 스쳐가며 살아왔다네. 내가 옛 동무의 도움으로 노자 대신 담배 두 짐을 얻어 한양에 올라온 것은 장차 도모할 일이 있어서라네.
서일수가 안색을 바꾸더니 술잔을 쳐들어 보였다.
자아, 술이나 한 잔 더 드세. 뜻있는 선비들은 아예 과거를 집어치운 지 오래되었네. 중인이나 서얼은 요행 합격하여 이름이 방목에 실리더라도 그 밑에 중인(中人)또는 서(庶)라고 꼭 병기되니 오히려 제 신분을 드러내게 되는 셈이라, 동접도 외면하게 되고 위에서는 관직에서 제외시킨다네. 그뿐인가, 아무리 양반의 집안에 태어나 실력을 갖춘 선비라 하여도 세도가의 집안이 아니면 관직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지. 한 세대가 삼십 년이라면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오백 군데가 채 못 되는데 그 기간 동안에 나오는 합격자 모두를 합치면 이천여 명 되겠지. 나머지 천오백여 명은 평생 벼슬을 바라다가 말라죽거나, 고향에 내려가 향교 서원을 드나들며 공연히 약한 백성이나 괴롭히며 일생을 마치겠지.
서일수는 자신이 읽은 뜻있는 선비의 세평을 아무런 비분강개의 빛도 보이지 않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권세 가문에 아들 하나 낳았으니 그 할아비와 아비를 본받아 양민에게 사납고 교만하기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데, 다만 글 읽기를 쓴 약보다도 싫어하였다. 손님이 왔다가 짐짓 조소하여 말하기를, 걱정 마라 너의 집은 하늘이 복을 내린 집안이라, 네 관직은 하늘이 정해놓은 것이니라. 청관 요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힘들여 애쓸 것 없고 매일같이 글 읽을 필요 없네. 때가 되면 저절로 좋은 자리 생기는데 편지 한 장 쓸 줄 알면 그로 족하리, 그랬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 말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다시는 서책을 보지도 않았다고. 가보잡기, 강패 놀이, 장기두기, 쌍륙 치기에 허랑 방탕하여 재목감도 못되지만 높은 벼슬 차례로 밟아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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