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 잊은 초여름 동백·해무사이 노을의 붉은 유혹
대천항에서 섬까지 뱃길로 1시간 30분 걸렸다. 이 정도 거리를 연안의 파도에 흔들리다 보면 몸은 적당히 노곤하고 마음은 적절히 질펀해지기 마련이다. 픽업 나온 경운기로 민박집에 실려간 뒤, 낮부터 '크라스'에 소주를 따르거나, 화투판에 좌정해야 할 것 같은 일행들의 눈치. 그런데 마중 나온 사람의 손엔 루부르박물관 같은 데 가면 목에 걸고 다니라고 주는 기계가 들려 있었다. 무선주파수인식기술(RFID)을 이용한 음성 안내 프로그램 단말기다. 아직 프로그램 제작 중이라는 걸 켜봤다. 곱지만 단호한 음성이 또박또박 흘러나왔다. "외연도에서 교통 수단은 여러분의 다리입니다!" 곧바로 트레킹이 시작됐다.
외연도는 뭍에서 약 53㎞ 떨어져 있다. 충남 보령시에 속한 70여 섬 가운데 가장 먼 유인도다. 바람 잔잔한 새벽엔 중국 땅에서 우는 닭 소리가 들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날마다 육지의 쾌속선이 와서 닿기 때문에 이제 그런 얘기는 생게망게하다. 금모래 펼쳐진 해수욕장은 없다. 새벽마다 시장이 서는 어항이라 섬의 규모에 비해 마을이 크다. 인구도 제법 된다. 선착장의 느낌은 그래서 호젓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마을에 그려진 젊은 예술가들의 벽화도 별 감흥을 못 줬다. 이러구러 질펀한 휴식이 못내 아쉬워지는 참, 트레킹 코스는 마을을 벗어나고 숲길이 시작됐다.
"이 동네에선 미친 동백나무라고 그래요. 지금이 유월인데…"
섬의 서쪽과 동쪽에 각각 솟은 망재산(171m)과 봉화산(279m) 사이 나지막한 마을 뒷산. 외연초등학교를 오른쪽에 끼고 오르는 산길은 빽빽한 나무들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엔 딱지 만한 크기의 빨간색이 가득했다. 동백꽃이다. 아직 가지에 매달린 것도 꽤 됐다. 춘백(春栢), 아니 하백(夏栢)이라고 불러야 할 동백나무들은 무척이나 굵고 키가 컸다.
늙은 후박나무와 팽나무들이 밀생하는 숲의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 역시나 '천연기념물 136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1,000년도 더 된 숲이다.
트레킹 코스는 나무 사이로 얌전히 뻗어 있었다. 언덕바지에 다다랐을 때 작은 사당이 하나 나타났다. 제(齊)나라 전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숲길 트레킹은 이 지점부터 역사 기행의 성격이 더해졌다. 외연도 여행의 큰 부분은 전횡의 이야기가 차지했다.
춘추전국 시대 사람인 전횡은 제나라 임금의 동생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그는 군사 500명을 이끌고 외연도로 피신했다. 천하를 통일한 한(漢) 고조는 그를 수하로 삼으려 했다. 투항하지 않으면 섬을 토벌하겠다는 엄포에 전횡은 섬 주민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부하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섬 주민들은 해마다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섬엔 전횡의 지략으로 흉년을 이겨냈다는 전설이 서린 바위해안(누적금)도 있다. 2,000년도 더 된 얘기가 어디까지 역사이고 어디부터가 전설인지 가를 길은 없다. 매년 음력 2월 보름 열리는 외연도 당제에는 한복 세 벌이 제물로 바쳐진다. 전횡과 그의 아내, 딸을 위한 것이다.
트레킹 코스는 경관을 보러 새로 길을 낸 게 아니라 마을의 역사가 담긴 옛길을 연결했다. 그래서 나무데크 깐 굽이굽이마다 섬사람들의 오랜 삶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까지 400년 넘게 이어져온 풍어당제에 쓰는 제물을 씻던 우물, 당제가 열릴 때 임신했거나 월경 중인 여인들이 피신해 있던 해막 터, 지게로 땔감을 나르던 언덕길과 봉화대 등이 이어져 있다. 제물은 지태라고 부르는 소를 쓰는데 소를 잡아 반으로 가른 뒤 오른쪽 고기만 쓴다고 했다. '피 부정'을 막기 위한 해막에서는 종종 출산도 이뤄졌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해막동이'로 불렸다. 외연도엔 노인이 된 20여명의 해막동이들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넓지 않은 상록수림의 끝머리에 사랑나무로 알려진 연리목이 있다. 뿌리가 다른 동백나무 두 그루가 하나의 가지로 연결된 나무다. 나무는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어린 연인들이 그 앞에서 어지간히도 괴롭혔나 보다 생각했는데 안내자는 2010년 가을 태풍에 입은 상처라고 설명했다. 꺾이고 할퀴어져 껍질이 떨어져 나간 수피가 연리목에 더 어울려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수 백 년 묵은 상록수와 상수리, 고로쇠, 찰피 등 낙엽수들이 키 작은 연리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러 겹의 가지와 잎사귀를 뚫고 연둣빛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숲을 돌아 북쪽 해안으로 내려오면 예쁜 몽돌이 투명하게 비치는 명금에 닿게 된다. 여기서부터 가팔라지는 산길을 오르면 섬에서 가장 높은 봉화산이다. 서해의 노을을 보러 오르려는 참인데 바다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연기에 가린 듯하다는 섬의 이름(外煙島)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터워진 해무는 낙조의 붉은 빛깔을 은은한 금빛으로 바꿔놓았다. 멀리 무인도의 정수리로 소리 없이 낙하하는 해. 음성 안내 단말기에 저 안개에 잠기는 해를 어떤 언어로 입력할지 궁금해졌다. 내내 왁자하던 일행들이 조용해졌다. 다들 적잖이 걸었는데, 생략하고 온 크라스의 휴식이 간절할 만도 한데, 나서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 여행수첩
●충남 보령시 대천항에서 하루 두 차례(하절기ㆍ 오전 8시 10분, 오후 3시) 외연도로 가는 쾌속선이 뜬다. 운항 시간이 바뀔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해야 한다. 신한해운 (041)934-8774. ●어촌계민박(041-931-5750) 등 민박집이 여럿 있다. 방은 총 100개 정도로 넉넉한 편이다. 낚싯배를 빌려 섬 주변의 무인도를 돌아볼 수 있다. 성복호(041)936-5029. ●원산도, 장고도, 삽시도, 고대도 등 주변 섬도 대천항에서 출발하는 배로 찾아갈 수 있다. 외연도에는 없는 해수욕장이 있다. 보령시 관광과 (041)930-3541.
보령=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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