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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찾기 포기했던 국군 유가족들 다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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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찾기 포기했던 국군 유가족들 다시 나선다

입력
2012.06.0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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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생전에 '잘 생기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의 유해를 꼭 찾아 먼저 가신 어머님과 합장해 드리고 싶습니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유해를 찾지 못한 국군전사자 위패 10만여 위(位)를 모신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앞.'6ㆍ25 전사자 유가족 DNA 시료채취행사장'에는 유가족들의 발길이 하루종일 이어졌다.

7살 무렵 전사한 아버지의 유해를 찾겠다고 DNA 채취에 응한 아들 구순일(68ㆍ경기 광명시)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는 혼절해 돌아가셨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동시에 잃은 어머니는 경황이 없어 젖을 못 먹은 막내 여동생까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몇 년에,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기술이 발전한 만큼 꼭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사한 오빠 고 윤기섭 상병을 찾겠다고 DNA 시료를 채취한 윤등자(80ㆍ경기 안양시)씨는 오빠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뒤 참전, 22세 때 전사한 것으로 기억했다. 윤씨는 "내가 살아있을 때 오빠를 찾아야 한다. 어느 산야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온다"며 "국가에서도 6ㆍ25 정신을 잘 받들어 유가족의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작은 아버지 고 박수만 일병의 유해를 찾는 박형태(53ㆍ서울 관악구)씨는 "아버지 형제가 10남매였는데 전쟁 당시 결혼하지 않았던 작은 아버지가 '집안에 나 아니면 입대할 사람이 없다'며 자원하셨다고 들었다"며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지만 꼭 작은 아버지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는 지난달 25일 북한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2구가 62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계기로 DNA 시료채취에 참여하는 유가족 수가 이전보다 2~3배 가량 늘었다고 밝혔다. 매일 20~30명의 유가족이 찾아온다. 아예 유해찾기를 포기했던 북한지역 전사자 유가족들의 문의와 DNA 채취도 크게 늘었다.

미발굴 한국전쟁 전사자는 남북한을 통틀어 13만여 구로 지금까지 6,492구의 국군 유해를 수습했다. 이중 신원을 확인한 유해는 109구인데 70% 이상이 유가족들의 DNA 샘플이 보관된 경우였다. DNA 시료 채취는 2003년의 357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만9,442명이 참여했다. 지난달 극적으로 돌아온 북한지역 전사자인 고 김용수 일병의 신원도 지난해 사망한 김 일병 형의 DNA가 보관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가족 DNA 샘플 수가 늘면서 신원이 확인되는 유해의 숫자도 늘어 2010년 6구, 지난해 7구였지만 올해는 6월까지 벌써 11구를 확인했다.

박신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전사자들을 찾으려는 열망이 강한 유가족 1세대들이 생존해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유가족 DNA 샘플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DNA 채취 대상은 친ㆍ외가 8촌까지다.

글ㆍ사진=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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