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웬걸 했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구속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정권이 말기는 말기인 모양이구나 하면서도 검찰이 드디어 야생성을 되찾는다 싶었다. 착각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전 위원장은 파이시티 뇌물수수 건이 터지자 "받은 돈을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를 위해 썼다"고 고백했다. 검찰은 부랴부랴 "정치자금 수사는 안 한다"고 선을 그었다. 돈 받은 사람이 용처를 밝혔는데 수사기관이 용처는 관심 없다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수조원대 개발이익이 예상됐던 파이시티 사업 인허가 비리 수사에서 기소된 게 달랑 5명이다. 최씨와 박씨, 돈을 준 브로커, 얼떨결에 걸려든 브로커의 운전사, 그리고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 거물들이 걸려든 수사치고는 너무 단출하다. 애초 검찰에 제대로 수사할 의지가 있기나 했나 의구심이 고개를 쳐든다. 하이마트를 수사하다 우연치 않게 압수한 수첩에서 최 전 위원장 뇌물 건이 드러나 울며 겨자 먹기로 손을 댄 건 아닌지, 연말 대선 임박해 더 큰 비리에 엮이기 전에 미리 작은 건으로 털어주려 한 거는 아닌지, '불순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곧 마무리한다는 민간인 불법사찰 재수사는 더 심하다. 검찰은 재작년 1차 수사 때 증거인멸을 인지하고도 적당히 봉합했다. 그러다 올해 언론 등이 증거를 찾아 떠 안겨주자 마지못해 재수사에 나섰다. 그러기를 70여일. 결론은 일개 비서관인 이영호가 몸통이라는 거다. 소가 웃을 일이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몸통임을 시사하는 정황이 한둘이 아닌데 꼬리 자르기의 전형이다.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만도 엄청 무리했다고 생각한 걸까. 종북으로 과녁을 돌린 걸 보면 한참 느닷없다. 우익단체 고발로 어엿한 정당의 중앙당사까지 압수수색 한 것은 전례가 없다. 정당의 심장인 당원명부까지 압수해 들여다 보는 판이다. 헌법과 법률에 보장된 정당활동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다. 수사에 활용은 안 한다지만 급소를 틀어쥐고 있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한마디로 "진보세력 꼼짝 마"다. 진보세력을 무력화하고 나아가 야권연대의 기반을 무너뜨리겠다는 심사가 엿보인다.
검찰이 공안몰이를 시작하자 이 대통령과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화답을 한 것도 목에 걸린다. 검찰이 판을 벌이고 대통령은 여당 선거운동을 돕고, 여당의 유력한 대선후보는 숟가락을 올리는 모습이 모종의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처럼 아귀가 맞는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노건평, 노정연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혈족이 지금 등장하는 것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검찰 스스로 꼬리를 내린 노건평 '수백 억대 뭉칫돈' 사건은 성급함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노정연 수사도 석연치 않다. 아버지가 서거해 내사종결 된 상황이어서 수사의 한계가 분명하다. 외환 불법거래 정도의 사안에 대검 중수부가 나선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검찰이 2009년 수사에서 환치기에 관여한 업자를 이미 조사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가 없다. 야권의 '친노'인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터무니없는 걸까.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마다 되풀이됐던 정치검찰의 망령이 되살아 나고 있음이 감지된다.
권재진 법무부 장관은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과 1년 이상 호흡을 맞춰왔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이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로 충성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명 때부터 여권 내부에서 조차 대통령의 측근을 앉히는데 대해 논란이 있었다. 대선의 중립적인 관리는 물론 검찰권의 중립적 행사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지적에 이 대통령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었다. 예상은 정확했다. 권재진, 한상대 콤비는 역시 자신들을 임명한 '주인'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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