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비난은 그렇지 못하다. 칭찬은 호의를 가득 머금은 미소와 함께 박수 한번 세게 쳐주는 일로도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지만, 비난은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직접 따져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난은 대개의 경우 칭찬 보다 훨씬 어렵고도 도전적인 과제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칭찬과 격려 보다 비난과 비판이 넘쳐나니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다. 더군다나 칭찬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강화하고, 나에게 보상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크게 열어두지 않는가.
타인 혹은 타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긍정적인 태도를 압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에의 욕구 때문이다. 비난은 칭찬보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의 가능성을 강화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고 그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부지런히 반성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현명하고 똑똑하고 영리한 머리를 굴리면서 모든 사안에 대해 나의 독자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과시욕 혹은 노출욕이 보통사람들보다 과장되어 있는 지식인들의 경우, 세상일에 대해서 비판적인 혹은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려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인정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비난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단순히 격한 어조로 혹은 더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의 강화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비난의 강화는 독창적 비난의 창안이라는 전략을 통해 우회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비난 말고 좀 더 새롭고도 기발한 논거를 개발하여 타인을 비난할 수 있기를 강하게 욕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비판의 강화라는 과제는 근본적인 비판에 대한 욕구를 부추기며, 이는 쉽게 양비론적 태도로 귀결된다. 게다가 공부를 조금 많이 하고 책을 조금 읽었으며 남들보다 머리가 조금 더 복잡한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양비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으니 여기저기에서 양비론이 넘쳐난다. 그러니까 A도 틀렸고, A가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B도 틀렸으며, 결국 이렇듯 A와 B가 모두 틀렸으니 세상 모두 틀린 것들뿐이라는 주장이다. 하기야 원칙적으로 양비론은 항상 옳다. 도대체 이 세상에 완벽히 도덕적인 의인이 어디 있을 것인가. 모두 결함과 단점을 지닌 이들 뿐이다.
그러나 양비론적 사고가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옳지 않음의 차이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A와 B는 당연히 모두 일정한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 결함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단순한 양비론은 이들의 차이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고, 헤겔의 표현을 빌면, 어두운 밤에 모든 소가 검은 색이라고 주장하는 유아적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정도의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세상에는 똥 묻는 개들도 있지만 겨 묻은 개들도 많은 법이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심지어는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똥 묻은 개들에게도 겨 묻은 개들의 처지를 지적할 자격이 충실하게 부여되어야 한다. 비난과 비판, 그것으로 엮이는 토론은 항상 구체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간 사람에게 당신은 어차피 부산까지 가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지금 부산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다그치면, 본인의 놀라운 신통력과 추리력을 과시하는 기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도 생산적인 토론의 결과물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논증과 비난은 정밀하고 자세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도, 진리도 역시 그 디테일 속에 있다. 종북 문제로 최근에 이렇게까지 시끄러우니 답답해서 하는 소리이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