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이 '1등의 역설'에 빠져 버렸다.
세계 최대규모, 최고기술을 자랑했던 현대중공업은 그 동안 저가 수주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입장. 일반상선 보다는 해양플랜트 쪽에 집중해왔고, 상선의 경우도 '1위 프리미엄' 때문에 낮은 가격의 발주제의는 가차없이 거절을 해왔다.
하지만 세계적 불황의 장기화로 조선소마다 일감의 씨가 마르면서, 현대중공업은 '자존심 영업'의 역풍을 톡톡히 맞고 있다. 수주가 줄어도 1등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자존심을 꺾더라도 수주에 집중할 것인가를 놓고 근본적 고민에 빠져 있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선박 건조 물량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는 수주잔량에서 현대중공업은 580만CGT(재화총톤수)에 그치고 있다. 삼성중공업(735만CGT), 대우조선해양(653만CGT)에 이어 세 번째로 뒤쳐진 상태. 확보된 일감으로 따지면 현대중공업은 3위로 밀려난 셈이다.
울산ㆍ군산조선소를 보유한 현대중공업의 연간 건조량은 1,300만톤. 하지만 현재 수주잔량은 1년치 일감 밖에는 안 된다. 추가수주가 없다면 1년 후에는 도크가 비워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통상 조선업체들이 조선소를 유휴설비 없이 안정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2년치의 일감은 유지해야 한다. 수주잔량이 그 아래로 떨어지면 도크와 인력이 남아돌기 시작한다.
현대중공업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 건 '1등 자존심의 후유증'이란 게 일반적인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재정위기 이전 글로벌 조선산업이 호황기일 때 유럽선주들이 경쟁적으로 선박 발주를 했고 세계 1위사인 현대중공업에 일감이 가장 많이 몰렸다"며 "당시 현대중공업은 가격이 맘에 들지 않으면 수주를 거절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후 세계 경기가 곤두박질치면서 발주가 급감했는데 현대중공업은 계속 호황기 선박가격을 고수하는 바람에 수주가 없어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수주잔량이 1년치 정도로 떨어지는 '위기'상황에 오자, 최근 들어 현대중공업도 가격에 융통성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이 타이완 선사인 에버그린으로부터 1만3,800TEU급 컨테이너선을 수주했는데, 시장 가격 보다 20% 가량 싼 값에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1등 조선사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도크를 놀릴 수 없는 만큼 다소 저가수주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은 현재 20%선인 중국산 후판 도입 비율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현대중공업 이재성 사장이 최근 중국 최대 철강업체인 바오스틸 사장과 만났는데, 이는 저렴한 중국산 후판을 늘려서라도 생산비를 줄이겠다는 의도도 읽혀진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수주실적이 부진했던 건 1등 기업의 자존심 차원이 아니라 수익성 위주의 수주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라며 "다시 공격적 영업활동을 벌이고 있는 만큼 목표달성은무난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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