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의 역사/로버트 P. 크리스 지음∙노승영 옮김/에이도스 발행∙356쪽∙1만8000원
누가 "지금 몇 시지?" 물으면 우린 자연스럽게 시계를 본다. 시계가 하나뿐이면 별 문제 없이 시간을 알려줄 수 있다. 그런데 시계가 둘 이상이고 가리키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면, 그것 참 난감하다. 어느 시계가 맞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표준'이 필요하다. 어느 시계가 얼마나 더 빠른지 알려면 표준 시계가 있어야 하고, 표준 시계를 만들려면 정해진 시간 단위가 필요하다. 길이나 무게, 온도, 전류 등도 마찬가지다. 길이를 재려면 자가, 자를 만들려면 길이 단위가 필요하다.
<측정의 역사> 는 그 단위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처음엔 사람들이 스스로 표준이 됐다. 주먹으로 쥘 만한 분량을 한 줌, 손을 완전히 폈을 때 가장 긴 거리를 한 뼘이라고 부르며 표준으로 삼았다. 한 발 길이를 뜻하는 단위로 고대 그리스에는 푸스, 옛 중국에는 척이 있었다. 신체 부위를 이용한 단위는 당연히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측정의>
그래서 인류는 특정 사물을 측정 단위로 정해놓기로 했다. 금속으로 만든 미터 표준, 킬로그램 표준 등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물은 불변의 단위가 될 수 없었다. 금속은 외부 온도가 변하면 길이도 무게도 조금씩 변할 수 있다. 표준이 변하면 그걸 토대로 만들어진 세상이 흔들리게 된다. 결국 과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자연현상을 표준으로 삼기로 했다.
세상에서 쓰는 모든 측정 단위의 표준을 만드는 과학자들의 모임이 국제도량형총회(CGPM)다. CGPM이 정의하는 1m는 빛이 진공상태에서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거리다. 1초는 세슘(Cs)-133 원자가 내놓은 특정 파장의 빛이 91억9,263만1,770번 진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제 세상의 모든 자와 시계는 이 단위를 표준 삼아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인류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표준이 권력과 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의 표준을 정하고 소유한다는 건 과거엔 왕의 권위나 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징표가 됐다. 군주는 도량형을 통일해 통치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영주는 도량형의 차이를 악용해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표준 체계의 변화가 정치사회적 권력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 책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점점 더 정확해진 표준은 권위와 함께 객관성과 보편성을 얻으며 세상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도 하게 됐다. 다른 나라 말은 못 알아 들어도 단위는 어디서나 통한다. 이 책을 옮긴이는 표준과 단위 덕분에 세계인들이 "질적으로 소통할 순 없지만 양적으로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점점 정확해지는 세상에 대고 저자는 철학과 교수답게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진다. 유해물질을 극미량까지 측정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세상이 완벽하게 안전해질까. 측정 기술이 덜 정확했을 땐 모른 채 지나쳤던 극미량의 유해물질을 제거하려고 엄청난 돈을 쓰는 게 과연 타당한가. 답을 얻으려면 '왜 측정하는가'라고 되물어보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측정 자체보다는 측정으로 얻으려 하는 목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생활에서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도가 필요한 건 아니다. 느슨한 척도에서 삶의 재미를 얻기도 한다. 미식축구에서 판정을 심판에게 맡기지 않고 선수가 전진한 거리를 GPS로 추적하면 오심은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미식축구의 '맛'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은 읽을수록 어려워진다. 점점 정확해지는 측정기술을 따라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저자가 애를 많이 썼다. 표준을 만든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삶, 브래지어 치수 표준을 만드는 어려움, 측정하면서 생겼던 각종 해프닝과 우스꽝스러운 단위들, 이런 이야기들을 양념처럼 넣어줬다. 과학책이라기보다 역사책이라 여기고 읽어보길 권한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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