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다가오는 것이 너무 불안합니다. 머리에 폭탄을 이고 있는 기분이에요."
서울 종로구 신영동 주민 엄모(57)씨는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엄씨의 주택은 산 바로 아래로 경사 20~30도의 비탈길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가을부터 산 소유주가 "빌라를 짓겠다"며 나무를 베어내고 흙을 쌓은 채 방치해 둬 큰 비라도 온다면 꼼짝없이 물 폭탄과 흙더미 세례를 받아야 할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엄씨의 집 밑으로 빌라 등 10여 가구가 더 있다. 엄씨는 "매년 장마철 마다 마당과 문 앞에 흙이 수북이 쌓였는데, 올해는 나무조차 없으니 어떻겠느냐"며 "2월부터 '안전 조치를 취하고 공사를 빨리 진행해 달라'는 민원을 종로구청에 수십 번 넣었지만 구청은 '산 소유주와 합의하라'고 책임을 떠넘기더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여름 장마를 앞두고 야산 하나 때문에 신영동 주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현장을 찾았을 때 약 1,430㎡ 넓이 공사지에 수해 방재 설비라고는 중턱에 씌운 폭 12m, 길이 15m의 방수포뿐이었다. 이 역시 엄씨의 계속된 민원에 못 이겨 3일 전에야 설치된 것이다.
빌라를 짓겠다는 공사 예정지에는 차가 여러 대 주차돼 있고, 동네 주민들이 만든 텃밭까지 버젓이 자리잡은, 한 마디로 버려진 민둥산의 모습이었다. 덤프트럭 2~3대 분량의 흙더미를 둘러싸고 있는 약 2.5m 높이의 철판 펜스는 손으로 짚기만 해도 흔들렸고, 떨어져 나간 적이 있는지 중간에 철사로 엮은 흔적도 남아 있었다. 30대 주민 김모씨는 "지난해처럼 국지성 집중 호우라도 내리면 서초구 우면산 산사태 때 같은 피해가 생기지 않을까 무섭다"고 하소연했다.
엄씨는 "구청에 민원을 넣을 때마다 담당자는 '소유주가 공사비가 부족해 공사를 빨리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만 전했다"며 "주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구청이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 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종로구청 관계자는 "산을 건축물을 짓기 위한 대지로 조성하는 '토지형질변경공사' 때 배수로 등 기본 시설 이외의 안전 조치를 취하도록 소유주에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현장을 둘러본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수해 시 산사태 발생 가능성이 높아 보여 종로구청에 전문가 안전점검을 시행하라는 의견을 전달했다"며 "구청은 애초에 안전 점검을 하고 땅 소유주가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는 것을 전제로 공사를 허가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본보의 취재가 시작되자 종로구청은 1일 "소유주에게 즉시 방수포와 모래주머니 등 방재 설비를 보강하도록 했다"며 "다음 주 중 전문가를 통해 안전 점검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설비 내용과 설치 시일에 대해서는 "안전 점검 후 논의할 것"이라며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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