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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금서의 추억

입력
2012.06.0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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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톰 아저씨의 오두막> <닥터 지바고> <신약성서> <카마수트라> <율리시즈> …. 이 책들의 공통점은 뭘까. 고전으로 대접받는 책들이라는 점 말고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목록에는,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한때 금서(禁書)였다는 사실이다. 금서 연구 전문가인 미국의 영문학자 니컬러스 캐롤리드스 등이 쓴 <100권의 금서>라는 책을 보면 서구의 정신사, 문화사는 곧 금서의 역사 그 자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캐롤리드스는 역사상의 금서를 4가지 기준에 따라 구분한다. 정치적 이유, 종교적 이유, 성적 이유, 사회적 이유로 탄압받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100권의 책은 이런 이유로 불태워지거나, 저자가 죽임을 당하거나, 법적으로 금지되거나, 출판을 거부당하거나, 도서관에서 쫓겨났다.

우리사회에서 다시 한번 금서가 문제가 됐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 때문이다. 국방부가 2008년 7월 23종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영내 반입 등을 금지한 데 대해 이 책들의 저자와 출판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이 근 4년 만인 지난달 31일 나왔다. 법원은 소를 기각하고, 23종 책의 불온성 자체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과연 어떤 책이 불온한 것이며, 누가 우리로 하여금 그 책을 읽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다.

23종의 목록에는 "과연 이 책이 불온한가"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책들이 포함돼 있다. 2008년 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가 알려졌을 때 그 중 몇몇 책은 잊혀져 가다가 오히려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몇몇은 기자와 인연이 있는 책들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현기영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는 1999년 제32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때 문학담당이던 기자는 심사위원을 위촉하고 이 소설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수상이 결정된 후 작가와 인터뷰했다. 이 책이 '느낌표'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돼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 몇 년 뒤의 일이다. 제주 4ㆍ3항쟁을 배경으로 한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이 작품을 생각할 때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늦가을 햇빛이 서울의 내 집 베란다에 따스하게 비칠 때면, 으레 고향 옛집의 마당에 멍석 깔고 노란 햇좁쌀을 널어 말리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햇볕을 허비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 시장에서 표고버섯이나 가지나물이라도 사다가 말려야 겨우 불편한 마음이 누그러든다'는 구절이다.

늦가을 햇볕을 아까워하는 그 마음은 작가뿐만 아니라 이 땅에 고향을 가진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이 소설은 국방부의 '북한 찬양'이라는 규정보다는, 이데올로기의 광란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렸던 우리 윗세대의 삶에 더 공감하게 만든다. 작가는 그 신산했던 삶에서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유년시절만이, '그 시절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세월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진다'고 쓰고 있다.

금서 목록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했다. 하지만 캐롤리드스의 <100권의 금서>처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집단에 의해 탄압받았던 그 책들이야말로 시대와 권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우리 정신사를 추동해온 힘이다. 그리고 이 책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 기성 질서와 체제에 대한 이의제기 내지 도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국방부 지정 불온서적이 다 그런 기록에 값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부라는 권력이 분명한 잣대도 없이 이미 독서대중의 긍정적 평가가 내려진 책들에까지 불온의 낙인을 찍는 시도가 온존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기실 우리는 오히려 금서를 읽고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권력이 금서로 막아 출판조차 되지 않던 책을 팸플릿 형태로라도 기어코 찾아 읽으며 우리사회는 민주화라는 산맥을 넘어왔다.

인생도 한 권씩 한 권씩 불온서적 독파 목록을 쌓아가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 어느쪽이냐 하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다른 어떤 매체와도 달리 활자로 된 책이야말로 진정한 각성의 기회를 주는 유일한 매체이며, 독서행위 자체에는 이미 어떤 책의 불온함이나 사악함을 넘어서는 힘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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