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베스트셀러를 포함해 시중에서 유통되는 책 23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영내 반입을 금지한 것은 국민 기본권 침해가 아니며, 저자 및 출판사에 대한 명예훼손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국방부의 조치는 군의 정신전력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 판결의 취지다. 하지만 불온서적 선정 및 기준 자체가 자의적이라는 지적, 누가 어떤 책을 읽는가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침해라는 논란을 법원이 외면했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3부(부장 이우재)는 31일 실천문학 등 출판사 4곳, 홍세화씨 등 저자 18명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으로 언론ㆍ출판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당하고 저자 및 출판사의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방부장관의 조치가 원고들의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했다고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이 조치로 기본권에 제한이 가해졌다 하더라도 헌법 37조2항(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필요한 경우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에 반해 원고들의 기본권을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국방부장관이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것은 가치 판단 또는 평가에 불과할 뿐 구체적인 사실 적시로 볼 수 없어 명예훼손이나 업무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군인의 복무 및 병영생활, 정신전력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은 행정부의 독자적 재량권을 인정할 수 있는 영역"이라며 "불온서적 지정은 국방부장관의 재량권 일탈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방부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23종의 도서를 낸 저자와 출판사들은 2008년 10월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동일한 사건에 대해 헌법소원 심판 신청이 제기됐다는 이유로 재판을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로 연기해오다 3년5개월여 만인 지난 3월 첫 재판을 시작해 이날 세번째 공판에서 선고를 내렸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2010년 10월 전ㆍ현직 군 법무관 5명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 조치에 대해 '불온서적의 소지와 전파 등을 금지하는 군인복무규율 제16조2항은 헌법상 명확성 원칙과 과잉금지 원칙 등에 위반된다'며 낸 헌법소원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6대3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날 판결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 당사자에 대한 법원의 첫 결정으로, 군 내부 규율에 군 법무관이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한 헌재의 결정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는 "청소년 유해물 지정과 달리 '불온'이라는 냉전시대의 산물을 기준으로 삼은 국방부의 특정 서적 영내 반입 및 소지 금지 결정은 문화적 자해에 가깝다"며 "이념투쟁을 출판계로 들여와서 소통과 창조를 경직되게 만드는 행정부의 우매한 정책을 사법부가 승인해준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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