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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그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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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그의 죄

입력
2012.05.3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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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스포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승부조작 소식이 드디어 막장으로 치달았다. 한때 국가대표이기도 했고, 리그의 명문 팀에서 활약했으며 해외진출에도 성공했던 선수가 부녀자를 납치한 강도로 전락한 것이다. 그는 각급 대표를 거치며 주목을 받아왔다. 해외진출 이후 하락세를 겪기는 했지만 강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이 젊은 축구 선수는 촉망 받는 프로 선수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피의자 신분이다. 더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이제 강도다.

한 사람의 악행에 대해서 분노하고 비판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쉬운 만큼 큰 의미도 없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한 인간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노함'은 오히려 문제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잃게 한다. 그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이코패스는 엄연히 우리 사회 안에 있던 하나의 사람이고, 범죄의 개연성과 책임 전부를 개인이 가진 병리학에게 몰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한 축구선수가 납치범이 된 과정에는 많은 사연과 구조가 껴들어 있다. 그의 범죄를 재구성해보자.

유망주 K는 부푼 꿈을 갖고 유럽으로 나갔다. 아시아는 이미 진즉에 재패한 이 선수는 국내가 좁게 느껴졌을 것이다.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팀에 입단한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유럽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가 받은 연봉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해외에서의 생활이 녹록하진 않았으리라.

그는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하고, 군대 문제 또한 해결하지 못한 채 국내로 유턴하게 된다. 국내로 돌아와서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유망주였던 후배들은 어느덧 각 팀에서 맹활약 중이고, 예전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군대 문제는 그를 압박했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촉망 받는 공격수였던 그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축구 선수가 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 브로커 역할을 하던 그는 곧 스스로가 승부조작의 몸통이 된다. 어느 순간,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손을 뻗친 폭력 조직과 검은 손은 그를 가만 두지 않고 협박 회유를 거듭했을 것이다. 결국 승부조작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고 그는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와 함께하던 동료와 그를 가르치던 스승이 승부조작 스캔들과 관련해 목숨을 잃는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이번 실수는 엘리트 운동선수가 그의 인생을 놓고 벌인 위험한 도박이었다. 완전한 실패였고 당연한 귀결이다. 실수 후에 그것을 수습하는 것도 그는 실패했다. 죄를 저지르고 거기에 죄를 더한 것이다.

최근 여러 학원스포츠에서 주말리그가 도입되고 있다. 여러 부작용이 있겠지만 주말리그는 운동선수도 그 또래와 함께 '배움'을 행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대전제는 흔들림이 없다. 여기서 배움은 학업 성적이 아니다. 스포츠가 아닌 다른 삶도 지속시킬 수 있는 자신감 등이다.

"20년 동안 축구만 해왔다. 다른 건 꿈에도 상상해본 적 없다."

"15년 동안 야구 하나만 생각하고 살았다. 야구는 나의 전부다."

아름다운 말이다. 성공한 선수의 입에서 나온다는 가정에서 말이다. 엘리트 코스를 지향하는 운동선수는 그 종목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바친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한다. 국가대표는 국가에서 가장 잘 하는 선수의 특권이다. 프로스포츠의 장벽은 높고 험하다. 해마다 드래프트에서 뽑힌 수보다 더 많은 수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며, 구단에서도 주전으로 나선다는 보장이 없다. 누군가는 수억원을 받지만 누군가는 월200만원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운동만 해온 선수가 운동을 하지 못할 때의 상실감, 두려움과 처참함을 우리 사회는 받아줄 수 있는가. 우리는 운동선수를 기계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성 이전에 성적이 우선되는 우리 사회가 그 동력이다. 국가대표에서 강도가 된 사내가 있다. 그의 잘못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죄의 바탕이 된 회색빛 도시가 그 안에 푸른 그라운드를 품고 뜨거운 여름을 스산하게 지나가고 있다.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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