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생긴 고약한 말버릇이 하나 있다. 어쩌자고 그런 입방정을 떨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기 몇 년 생이에요? 하고 불쑥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 또래를 만났을 때는 어색함도 털 겸 금세 화기애애 해지는 것이 꽤 유용한 화법이 되어준 것도 사실이나 실은 무례함의 발로라는 것을 안다.
대체 왜일까. 왜 나는 당신의 나이가 궁금한 걸까. 나잇값은 하고 사냐는 질문 같아 뜨끔한 채로 내가 어느 만큼 살아왔나 반추해봤다는 어른들이 간혹 있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매일매일 그 질문을 받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증거하는 필요충분조건이겠구나 싶은 이들에게로 눈이 갔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대체 인간의 뇌에 어떤 인자가 박혀 있기에 위안부라는 끔찍한 발상이 연출될 수 있었단 말인가. 일제강점기로부터 지금껏 근 백 년 역사 속에 한 분 한 분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눈 감아 가시는 바, 언제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 항의플래카드만 펄럭이게 할 셈이람.
떡 하면 국민을 상대로 고소하고 고발하고 법 운운하기를 즐겨 하는 정부, 왜 일본에게는 큰소리 뻥뻥 못 치나. 언제까지나 키다리 가수가 노래하며 발차기하며 빚져가며 들인 돈으로 전세계에 부당함을 호소하게 할 셈이람. 나도 할 말은 없다. 내 친할머니였어도 이렇게 뒷짐지고 있었을까. 하이힐을 도시락 폭탄처럼 던졌을 거다. 피가 무서운 고로.
김민정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