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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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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입력
2012.05.3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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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도 생태라는 것이 있다면, 5월은 그 생태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다이내믹한 시기다. 교정은 엷은 연둣빛 나무 그림자와 여기저기서 망울을 터트리는 봄꽃들 덕분에 선선한 공기로 가득 찬다. 중간고사를 끝낸 학생들은 그만큼이나 푸르고 화사한 얼굴로 학교 안팎을 누비고 다닌다. 또 대학 구성원들의 손에는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을 기념하는 작은 꽃송이들이 5월 내내 둥실둥실 들려 다닌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태껏 5월 대학가의 역동적인 풍경을 구축해온 것은 봄 축제와 봄 정기학술대회였다. 그 둘은 일견 놀이와 연구로 상반돼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둘은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하고, 진보적이면서 반성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동시에 세속적 메커니즘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대학 특유의 문화 및 정신을 형성해온 기제다. 1968년 파리의 '5월 혁명'이 그런 대학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촉발됐고, 80년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시민의 힘과 더불어 학생들의 그런 민주주의를 향한 의식과 실천에 따라 이뤄졌다. 또 89년 중국의 '천안문 사건'도 마찬가지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이 이를 예증한다. 시대, 사회, 문화, 국가, 민족성은 각기 달라도, 그 운동들은 모두 5월의 대학가에서 들불처럼 타올라 크든 작든 간에 지금 여기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대학축제가 올해도 어김없이 열렸다. 특설 무대가 가설되고, 색색의 천막이 교내 곳곳에 줄지어 들어섰으며, 차량이 통제된 푸른 교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인파로 숨 쉴 틈이 없었다. 축제 기간 내내 볼륨 높이 울려 퍼진 K팝은 아무리 완고한 교수라도 강의를 고집할 수 없게 했지만, 학생들은 분명 거기서 커다란 해방과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음악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고 밤늦게까지 청중의 환호성과 얽힌 채 아카데미 담장을 넘었을 텐데, 인근 주민들은 그 때문에 밤잠을 설쳤을지도 모른다.

임시 천막들 아래 단과대 또는 학과 학생회 주최의 일일주점이 열리는 일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몇 년 전부터 대학축제의 보다 큰 좌판을 차지한 측은 기업들이다. "○○대학과 함께 하는", "젊음의 열기를 후원하는" 등등의 수식어를 내걸고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부터 각종 음료회사까지 나서서 축제 현장에 크고 요란한 부스를 차린다. 그리고는 이내 행사 도우미들이 나서서 똑같은 멘트의 상품 홍보를 하루 종일 반복하며 무료 서비스, 사은품, 게임 이벤트 따위로 학생들을 유혹한다. 백화점의 마케팅과 별반 다를 바 없으며, 길거리 가게들의 홍보 방식과는 완전히 똑같다. 학생들은 그런 상업 부스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은 기꺼이 긴 줄을 서서 앙케이트에 응하고, 사은품을 받고, 상품을 둘러본 후 '대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는 할인 상품을 구매해 즐거운 얼굴로 부스를 나온다. 그 모습 또한 시장의 여느 소비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상품이 거기 있으니 당신은 쇼핑하시오'라는 소비자본주의가 대학축제현장까지 관통했다고 말하면 진부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이 문제적인 것은 비단 대학의 상업화 때문만은 아니다. 더 심각한 사실은 앞서 말한 대학 특유의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문화와 정신이 숨 쉴 공간을 잃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문화와 정신이 우리 삶에서 현실에 억눌리지 않는 다른 공간, 이를테면 꿈과 비전을 생성하는 공간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대학과 시장이 일치하는 오늘은 숨이 막힌다.

개념미술가 바바라 크루거는 1987년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I shop therefore I am)라는 작품으로 미국의 소비사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 대학가는 인간 이성을 존재 근거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신 기꺼이 크루거 작품의 그 비판적인 말을 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강수미 미술평론가·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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