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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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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45>

입력
2012.05.3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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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없이 저녁밥을 먹었다. 반찬 그릇에 서로의 젓가락이 엉키는 순간을 피하여 멈추기도 하면서 눈을 아래로 깔고 먹다가 밥이 절반쯤 줄었을 때에 서 가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좀 전에 듣자 허니 식년시 보러 오셨다면서?

예? 아 뭐 그냥 구경 삼아 왔지요.

초시는 하셨나?

향시를 안 거쳤으나 한양에서는 복시에 응할 수 있다더군요.

서 씨가 빙긋이 웃더니 말했다.

초시고 복시고 그냥 들어가 시지에 써서 내는 거요. 그걸 모입(冒入)이라구 하는데 누가 막을 사람도 없지요.

서 씨는 밥그릇을 모두 비우고 대접에 내온 숭늉을 빈 그릇에 따라 쭈욱 마시고는 말했다.

요즈음 과거란 게 아예 난장판이오. 벼슬을 사고 파는데 글이고 과거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급제자는 저희끼리 뒤에서 다 정해놓고 형식으로만 치르니 철모르는 촌 선비들은 일생을 허비하는 게지.

신이는 자신의 처지를 말할 수도 없었고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공손히 말했다.

무슨 벼슬을 바라는 게 아니라, 글 읽는 사람으로 스스로의 기량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내가 틈나면 과장에 안내해줄 수도 있소.

한양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신이 물으니 그가 껄껄 웃고는 대답했다.

돈 벌러 왔지. 내가 장수에서 왔다고 하지 않습디까? 담배는 북으로는 성천초요, 남에선 장수초라구 하오. 내 담뱃짐을 잔뜩 해가지고 올라왔구려.

신이가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니 벽의 횃대에 걸린 두루마기며 흑립으로 보아 의관이 점잖고 주름살이나 수염의 풍모로 보더라도 자기보다 연배도 훨씬 위인 것 같았다. 저녁은 먹었으나 아직 잘 시간도 멀었고 방안의 다른 일행들과 섞여서 마음 놓고 웃고 떠들 수도 없어서 그들은 자연이 마당의 평상으로 나와 탁주 두어 되를 나누어 마시게 되었다. 서로 간에 정식으로 통성명을 하니 그의 이름은 서일수(徐一壽)라 하였는데 나이는 서른다섯이었고, 신이가 그와 얘기를 나누어본즉 전국을 돌아다녀 견문이 넓었고 박식하였다.

또한 하룻밤을 나란히 자고 일어나니 어쩐지 더욱 가까운 사이로 여겨진데다 아무리 타관 벗 십 년 차이라 하나 동무를 삼을 수는 없는지라, 신이는 그를 자연스럽게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이 어제처럼 겸상하여 아침을 먹고는 느지막이 남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새벽 장은 벌써 파장이 되어 한산했다. 명례방, 태평방 지나 청계천 광통교를 건너 종루에 들어서자, 육의전 행랑이 시작되는 거리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보은 시골서 온 신이의 눈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온 것 같았다. 일대의 가게가 삼천이 넘는다 하였으니 모두 둘러보자면 하루에 절반도 못 본다고 그랬다. 앞서서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걷는 서일수를 놓치지 않으려다 뭐라고 외치며 오는 행상꾼들과 부딪쳐 작은 시비가 일어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대문의 동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못 미쳐서 배오개(梨峴)에 이르렀고 건어물이며 약재와 버섯 등속의 전들 사이에 있는 한 연초전(煙草廛)에 들어섰다. 연초전의 앞 좌판에는 각종 썬 담배와 잎담배며, 곰방대, 장죽, 담배통, 재떨이, 장죽꽂이 등이 있고 은, 놋쇠, 물소뿔 등으로 담뱃대의 장식이 다양한데 돈피 쌈지, 수달피 쌈지, 비단 쌈지 등에다 단방 부시와 석유황, 일본 수입품인 갑성냥도 있었다. 천장에는 잘 마른 담뱃잎이 줄줄이 걸렸고 마치 약방처럼 너른 방안에 손님들이 무슨 집회나 하듯이 빙 둘러 앉았는데 맨 안쪽 가운데에서 주인은 작두에 담뱃잎을 썰고 있었다.

주인장 평안하시우?

서일수가 들어서며 한마디 하자 그가 돋보기 너머로 낯선 이신을 빼꼼이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목례를 하고는 손님들 사이에 끼어 앉자 그들은 하던 얘기를 다시 계속하는 것이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서초가 부드럽고 향기가 납디다.

나는 서초 중에 성천초는 너무 순한 것 같아. 오히려 해서의 신계초가 너무 탁하거나 맑지 않고 구수하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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