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는 오래 전부터 '신의 직장'으로 꼽혀왔다. 취업난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요즘엔 '신이 다니고 싶은 일터'로 불릴 정도다. 높은 보수와 안정된 근로환경 덕에 누구나 선망하지만 아무나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다. 좁은 문(채용)을 통과하더라도 높은 벽(승진)이 가로막는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새 서서히 빗장이 열리고 유리천장은 금이 가고 있다. 아직 멀었다고? 시작이 반이다. /편집자
이순우(62) 우리은행장은 최근 들어 눈물이 부쩍 잦아졌다. 고졸 행원 탓이다. 올해 1월 고졸 신입행원 사령장전달식에서 울음을 터뜨리더니, 스스로 고졸 행원을 일컫는 "우리 보배" "우리 막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할 때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는 "합격 축하 난(蘭)을 보낸 고졸 행원들의 집은 낮에 가족이 없거나 대부분 옥탑 방, 반지하 방이더라"며 "행장 취임 이후 가장 잘 한 일이 고졸 채용"이라고 할 정도다.
그의 측은지심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은행은 3월 서울 회현동 본점 대강당에서 은행권 최초로 고졸 채용설명회를 열고 200명의 고졸을 뽑았다. 이 행장은 직접 학생들을 상담하고 격려하며 500명이 운집한 한판 대동(大同)의 장을 이끌었다. 이어 우리은행은 최근 30명의 장애인을 특별 채용한다는 협약을 장애인고용공단과 맺고 '열린 채용'의 신바람을 이어가고 있다.
실업계고교를 나온 김보라(19)씨의 보물 1호는 대한생명 사원증이다. 7개월 전만 해도 합격을 반신반의했다. 금융관련 자격증을 따고 해외봉사활동, 가상면접 등 나름 준비를 했지만 고졸 출신으로 금융회사에 입사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그는 해냈고, 곧 들어올 후배들에게 경험담을 소개할 기회가 주어질 만큼 성장했다. '차별 없는 능력 중심'이라는 대한생명의 채용원칙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적어도 고졸 채용은 금융권에선 이벤트가 아닌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생색내기에 그쳤던 고졸 채용을 은행들이 앞다퉈 늘려가고 있고, 다른 금융회사들도 동참하는 분위기다. 취업에 성공한 고졸자들이 점차 능력을 발휘하면서 졸업장은 서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힘을 얻은 덕이다. 학력 인플레 해소를 통한 사회적 비용절감, 고졸인력의 실업문제 해소 등 보다 넓은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126명의 고졸인력을 채용했고, 올해도 비슷한 수준의 고졸 전담 텔러(창구직원) 및 본부 고졸 사무인력을 뽑을 예정이다. 지역별 수급을 감안해 열린 공채 및 특성화고의 우수인력 추천을 통해 현재 80명의 고졸인력 채용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8명의 고졸을 뽑은 국민은행은 올 상반기엔 20명으로 채용 규모를 대폭 늘린다.
기업은행은 보다 체계적이다. 2010년부터 전국 348개 특성화고와 취업지원 협약을 맺어 인재들을 키운 뒤 채용에 나섰고, 채용 숫자도 현장의 고객 반응을 살펴 점차 늘려가고 있다. 비(非)은행권 중에선 삼성과 대우증권(증권), 삼성카드(카드) 등이 고졸 채용에 앞장서고 있다.
주로 고졸 여성 중심이던 채용대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남자 고졸행원들을 뽑기 시작했고, 장애인, 다문화가정 자녀, 지방 출신 등으로 보폭을 넓혀가는 추세다.
농협은행은 4월 신규직원 채용에서 지방 출신이 75%에 이를 정도로 선도적이다. 씨티은행은 장애인 및 보훈대상자에게 가산점을 주고, 관련 기관과 더불어 인재 발굴에 힘쓰고 있다. 지방영업점은 해당 지역 출신 인재를 우선 뽑기 위해 각 지방국립대를 거점으로 캠퍼스채용을 진행하고 있다. 하나대투증권 역시 지역인재 선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이 올 상반기 다문화가정 자녀를 정식 채용키로 했고, 기업은행은 다문화가정 이주민 여성을 고용키로 하는 등 '다문화 채용 바람'도 불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의무고용비율(2.5%)은 여전히 못 맞추는 형편이다. 장애인 고용실적이 2.29%인 기업은행과 비록 본 업무는 아니지만 시각장애인을 뽑아 사회공헌 업무에 배치한 현대증권 정도가 눈에 띈다. 차츰 안착하고 있는 고졸 채용과 비교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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