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4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44화>

입력
2012.05.30 11:49
0 0

이신이 한양에 당도한 것은 삼월 초닷새 즈음이었다. 그는 숭례문으로 들어가 먼발치에서 왕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육조 거리도 넌짓 살피고, 종루 시전을 돌아다니며 전의 갖가지 물건 구경도 하고, 아무래도 숙식비도 싸고 객점도 즐비한 숭례문 바깥 칠패의 주막거리로 나아가 주인을 정하였다. 숭례문 안쪽 수표교 부근은 주로 채소며 청과를 파는 새벽 장이 섰는데, 바깥쪽은 칠패에서 청파와 만리재, 애오개 등지의 저잣거리가 이어져 주막이며 객점이 많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장사치나 여행객들이 봉놋방의 형편은 문안보다 낫다고 모여드는 곳이었다.

물론 지방 관아치들이나 양반들의 경주인을 하는 물상객주는 번듯한 기와집이 많은 종루 육의전 행랑의 뒷동네라든가 배오개 인근으로 숙소를 정하였다. 숭례문 안쪽에 있는 선혜청에 쌀과 무명과 봉물을 납품하러 올라온 지방 관속들도 이곳을 찾았다. 서울의 사대문은 이경 무렵에 종이 울리면 모두 닫고 통행금지했다가 새벽 오경 무렵에 파루를 쳐서 문을 열었다. 권세가에 줄을 댄 양반들은 밤늦게까지 사대부가의 사랑이나 색주가 출입으로 통금을 불편해하였으므로 사대문 밖에 사처를 정하지 않으니, 저녁녘의 남문 밖은 상민들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신이 시내 구경을 마치고 숭례문 부근으로 되돌아오는데, 성문 앞에 늘어선 중노미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집으로 가자고 팔을 끌었고 그는 가격을 일일이 따져 묻고는 중간쯤 부르는 아이를 따라갔다. 남문 앞 대로 양쪽으로 초가집이 빽빽이 늘어섰고 남지(南池)를 돌아 이문골로 들어서니 골목 안쪽에 토담을 올린 초가지붕의 객점이 있었다. 벌써 마당에는 묵고 있는 길손들이 세수도 하고 평상에 앉아 술도 나누는 것이었다. 주인이 그를 맞으며 물었다.

얼마나 묵으시려오?

대개 한양에 올라온 이들은 수백릿길을 왕래하여 이삼일 묵었다 가는 이는 없어서 아무리 바빠도 닷새 이상 요량하고 오기 마련이었다.

글쎄요, 한번 지내보십시다.

그러슈, 봉놋방 쓰시겠지. 사흘치 미리 줘야 하우.

최소한 사흘 숙박비는 미리 받아두겠다는 소리였다. 이신으로서는 이 집 형편도 아직 모르니 머물고 보다가 불편한 점이 없고 식사도 괜찮으면 그때 가서 장기 숙박을 할 예정이던 것이다.

아침 자시면 닷 푼, 저녁도 드시려면 일곱 푼 내야 되오.

신이 괴나리봇짐에서 엽전을 내어주니 주인은 제법 의관을 차려입은 그의 아래위를 쓱 훑고는 물었다.

뭐, 식년시 보러 왔소?

예, 과장이 열리긴 열립니까?

이번 열 사흗날이랍디다. 좀 이르게 오셨군. 한 사날 지나야 몰려들 텐데.

봉놋방에는 매끈하게 깎은 장침이 벽 쪽에 일렬로 놓였고 한쪽 벽에는 횃대를 매달아 옷이나 갓을 걸도록 했다. 제 집이라면 베개나 목침이 놓여야 할 테지만, 봉놋방이란 여럿이 묵는 곳이라 술 먹고 싸움이 벌어지고 자다가 코를 곤다며 목침을 집어던지는 일이 많기 마련이었다. 아예 그럴 일이 없도록 맞춤한 굵기의 통나무를 매끈하게 다듬고 머리를 댈 자리마다 움푹하게 깎은 장침을 늘어놓은 거였다. 방안에는 서너 사람이 먼저 와서 눕거나 돌아앉아 제 볼일을 보고 있었다. 맨 안쪽의 북쪽 미닫이창 옆에 누군가 먼저 와서 장침 한 켠을 베고 누워 있었다. 신은 두리번거리다가 안쪽이 그래도 나을성싶어 먼저 온 사람 옆에 가서 의관을 벗어 걸고 봇짐은 머리맡에 놓았다. 우두커니 앉았으니 겸상이 차례로 들어오는데 밥과 국 한 사발에 찬이 세 가지 놓였다. 중노미가 신의 자리 앞에다 밥상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옆 손님과 같이 드시우. 다 자시건 툇마루에 내놓으슈.

밥상 앞에 앉고 보니 옆 사람은 잠이 들었는지 나직하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이신은 그의 팔 한쪽을 잡아 흔들었다. 그는 먼저 신이에게 눈을 맞추었다가 옆의 밥상을 힐끗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수저를 들기 전에 잠깐 마주보았다. 이신이 먼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보은 사는 이 서방이라구 합니다.

장수에서 온 서 가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