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짙어 가는 녹음 뒤 웅대한 설산… 차창 밖 풍경마다 그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짙어 가는 녹음 뒤 웅대한 설산… 차창 밖 풍경마다 그림

입력
2012.05.30 11:35
0 0

여행의 경험이 쌓일수록 여행의 참맛은 '짜여지지 않은' 순간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일테면 해를 따라 무작정 서쪽으로 걷다 마주친 낯선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촉감 같은 것.

해외 여행은 그런 매력적인 우연과는 거리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의 여행은 대개 공항까지 픽업 나온 전세버스를 타고, 또는 가이드북의 지시를 따라 시내로 가는 전철을 타고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걸 타고 여행지를 돌아다니다 그런 걸 타고 다시 공항으로 향한다. 단체 패키지로 구매한 상품이든 나홀로 떠난 배낭 여행이든 매한가지인 건, 이동하는 순간의 자유가 무척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때론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곳에서 내키는 대로 핸들을 꺾고픈 욕망을 느껴본 적 없었는지.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필요한 건 그저 약간의 용기와 조금 넉넉한 일정. 가까운 일본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차를 운전하며 누비는 북쪽 홋카이도(北海道)의 자연, 그리고 타박타박 걸어서 맛보는 남쪽 규슈(九州)의 속살이다.

하코다테(函館) 공항에 도착해 바로 렌터카 회사로 향했다. 동행한 사람수를 생각해 8인승 토요타 알파도를 빌렸다. 일본 도로의 차량 진행 방향은 한국과 반대, 신호체계도 다르다.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스럽지만 이내 적응됐다. 운전 경력 5년 이상이라면 1시간 정도만 타보면 익숙해진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한국어로 안내되는 길을 따라 고료카쿠(五稜郭)성으로 향했다.

몇 번 이곳 여행을 하면서 느끼지만 '일본스럽다'. 잘 정비된 차도와 인도에선 담배꽁초 하나 찾을 길 없다. 성으로 가는 길에 초ㆍ중학생으로 이뤄진 가장행렬과 마주쳤다. 해군제독 에노모토 다케야키를 추모하는 행렬이다. 고료카쿠성은 에도막부 말기 하코다테 전쟁의 중심지. 에노모토는 그 전쟁에서 구 막부군의 선봉장이었다. 어린 학생으로 이뤄진 밴드행렬의 모습이 예쁘고 귀엽다. 성은 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카다 도시조를 비롯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숨진 막부병사들의 마지막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차를 돌려 시내로 향했다. 차창을 여니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맑은 공기만큼이나 상쾌하게 다가왔다. 항구 주변 유럽풍의 작은 길이 아담하고 깨끗하다. 차를 멈춘 곳은 19세기 중엽 세워진 토라피스치누 수도원과 모토마치 성당 하리스토 정교회. 중세 분위기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문득 야경이 보고 싶어졌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코다테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차를 댈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은 유료주차장이었다. 야경이 신기하게도 한반도의 모습과 닮았다. 여기저기서 "스고이(광장하다)!"를 연발한다. 전망대 소장은 "6, 7월 본격적인 오징어 철이 되면 항구 주변에 집어등을 밝힌 어선들이 바다에 반사되어 미항(美港) 그 자체"라고 했다.

다음 행선지는 오누마(大沼). 내비게이션에 '오누마'를 입력했다. 2차선 국도에 올라타니 갓길 쪽에 2~3m 높이의 막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폭설이 내려 몇 m씩 눈이 쌓였을 때 차선역할을 대신하는 교통표지다. 다시 꼬불꼬불한 국도로 들어서자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흐려졌다. 그래도 카누를 타고 습지의 한 가운데로 향했다. 카누의 노로 갈대와 수초 밑을 훑으니 커다란 잉어들이 물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물안개 낀 신비한 늪의 모습. 딥 퍼플의 노래 'Smoke on the water'가 생각난다.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햇빛이 도야호수에 반사된다. 제주도처럼 섬의 날씨는 언제나 변화무쌍했다. 화산의 연기가 제법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10~2000년에 걸쳐 네 번이나 분화한 활화산 우수(有珠)산이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에 전시된 1977년 분화 당시의 모습은 엄청나다. 어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초원 위 목장 옆으로 난 시골길을 타고 니세코(ニセコ)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오른쪽 요테이(羊蹄)산 정상엔 아직 눈이 쌓여있다. 황혼에 반사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드라이빙 투어의 마지막 날. 아이누족 말로 '여름의 마을'이라 부르는 샤코탄(積丹) 반도를 달렸다. 초록바다와 녹음이 짙게 깔린 산 사이로 굴곡진 해안도로. 바위 사이로 뚫린 터널을 여러 개 지나갔다. 도로 중간마다 아쉬울 만하면 나타나는 휴식장소. 바다를 볼 수 있는 화장실이 환상적이다.

다시 핸들을 잡았다. 향긋한 풀과 바다내음 저 멀리 바다 쪽으로 튀어 나온 가무이미사키(神威岬)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안도로를 10여분 달리자 자그마한 어촌이 보인다. 음식점을 찾아 가게 앞에 주차했다. 5월 이 지역의 명물 성게덮밥을 주문했다. 성게의 향긋한 맛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차에 올랐다. 푸른 초원과 녹음이 짙어지는 뒤편으로 설산(雪山)이 아련하게 보였다. 서울 도심의 끈적이는 공기와 일상에 지친 심신은 어느 새 맑아져 있다.

샤코탄 반도를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도로 위엔 따스한 햇빛과 상쾌?대기와 뒤섞여 있었다. '러브레터'의 촬영지 오타루(小樽)에 가보고 싶어 바닷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운하 옆길을 따라 시내 중심가로 다가가자 유럽풍의 자그만 상점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다.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저마다 행복한 표정이다. 오타루를 출발해 삿포로로 향하는 길 차 저편 바다 멀리에 짙붉은 노을이 타올랐다. 사흘 동안의 행복한 섬 홋카이도 드라이빙 투어에 행복한 마침표였다.

여행수첩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여행사 시키노타비(www.hokkaido.co.kr)에서 홋카이도 드라이빙 투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070)8245-0104. ●렌터카를 빌릴 때는 한국어가 지원되는 내비게이션과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하이패스에 해당되는 ETC카드를 장착한 것이 좋다. ●홋카이도 가는 하늘 길은 다양하다. 한국 발 비행기가 가장 활발하게 오가는 곳은 중남부의 신치토세공항이다. 인천공항과 김해공항에서 주 20여회 항공편이 있다. ● 규슈올레 정보는 규슈관광추진기구(www.welcomekyushu.or.kr)나 제주올레(www.jejuolle.org)에서 얻을 수 있다. 코스, 교통, 숙박, 음식, 주변 여행지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 제주올레 (064)762-2190.

홋카이도=글ㆍ사진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