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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백수 시대/ <중> 고용 대책 허점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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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백수 시대/ <중> 고용 대책 허점투성이

입력
2012.05.2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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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 일자리 내놓고 생색… "노인을 위한 정부 정책은 없다"

IT기업 경리, 임플란트 수입회사 전무, 해운회사 전무, 주차 안내원, 미화원, 보험판매원. 이춘식(69)씨가 환갑 이후 차례로 거쳐온 직업들이다. 이 직업들만 봐서는 이씨가 은퇴 전 어떤 일을 했을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짧게는 10개월, 길면 2년 정도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해 온 이런 일들마저도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이 되면서 다 끊기고 말았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이씨는 군대 제대 후인 스물 네 살 때부터 꼬박 30년을 무역업계에서 일했다. 25년간 무역회사를 다니며 수입과 무역 중개 경력을 쌓은 그는 공장 자동화 기계를 수입하는 작은 회사도 차렸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5년 만에 회사가 부도가 났고, 당장 돈이 급했던 그는 한 대형 보험사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다가 59세 때 정년에 걸려 일을 그만뒀다.

무역업에 대한 노하우와 영어와 일어 실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환갑이 넘은 그를 고용하려는 곳은 없었다. 경쟁력을 높이려 컴퓨터 자격증을 따 IT기업 경리로 입사했지만 회사 인수합병(M&A) 때 구조조정 대상이 됐고, 무역 관련 회사 전무로 입사해 다시 꿈을 펼치려 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영세기업들이라 이내 도산하고 말았다. 갈 곳 없던 그는 결국 주차안내원, 미화원으로 일했다. 이마저 1년 계약으로, 지난해 5월 계약이 끝났다. 이씨는 늘 불가피하게 회사를 옮겼지만 나이는 더 들고 회사를 자주 바꿨다는 경력까지 더해져 일자리 구하기는 힘들어져만 가고 있다.

이씨는 "그동안 모아뒀던 돈도 이제 한 달치 생활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며 "나이 들면 임금 덜 주는 거 충분히 협의할 수 있으니까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일자리에서 내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자란 일자리, 느는 건 단순노무직뿐

우리나라에서 가장 평범한 60대라 할 수 있는 이씨의 직업 인생은 기회도 적고 질도 낮은 노인 일자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보건복지부의 노인생활실태조사(2008년)에 따르면 일자리가 없는 65세 이상 노인 355만명 가운데 구직 희망자는 114만명에 달하지만 정부가 창출하는 일자리는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22만여명에 불과하다. 또 지난해부터 은퇴가 시작된 베이비붐 세대(1955~63년 출생자)는 2020년까지 총 140만명이 대거 퇴직할 것으로 추산되는 등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노인은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일자리의 질은 터무니없이 낮다. 2010년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55~79세 고령 임금근로자의 28.1%가 단순 노무직이고 있고 농업숙련(21.3%) 판매(11%)가 뒤를 이었다. 특히 2005년보다 단순 노무직의 비율이 2.8%포인트나 증가해 갈수록 일자리 질 악화가 심화되고 있다. 임금근로자의 연령별 사업체 규모만 보더라도, 50~59세 노동자의 1~9인 미만 영세 업체 종사자는 39.0%지만 60세 이상 노동자는 55.5%가 이런 영세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즉 직장에서 퇴직한 후 재취업할 때는 영세업체, 단순 노무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예 구직을 포기하는 노인들이 많다. 취업의사가 있는 베이비붐 세대 비경제활동인구 4명 중 1명은 "원하는 임금, 근로 조건에 맞는 일자리가 없을 것 같다"(23.9%)며 구직을 포기하고, "이전에 찾아봤지만 일거리가 없었다"(20.7%), "근처에 일자리가 없을 것 같다"(12%)는 응답까지 합하면 절반 이상이 "일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아예 구직을 포기했다.

기업 "노인 No", 정부는 소극적

이처럼 양질의 노인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근본적으로 기업들의 노인 기피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연공서열제로 인해 나이가 많은 직원들은 생산성에 관계없이 급여를 많이 줘야 하고 '관리'하기도 쉽지 않아 고령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정년단축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나라 300인 이상 기업의 평균정년은 56.7세(실제 퇴직 연령은 53세)에 불과하다. 반면 유럽 대부분 국가의 정년은 65세(실제 퇴직은 61.84세)이고, 일본은 최근 65세 정년을 법제화하기로 했으며, 미국은 연령을 이유로 한 강제 퇴직을 금지하고 있다. 결국 노인들은 그 어느 나라보다 일찍 직장에서 내쫓겨 열악한 일자리만 전전하는 구조인 것이다.

적극적으로 고용을 유지하기보다 단기 일자리라는 임시방편에 머물고 있는 정부 고용정책도 문제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만큼 정부는 정년 연장 법제화 등 제도적으로 고용유지 방안을 만들어가야 함에도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한 단기 일자리 제공과 고령자고용촉진장려금 지원을 淪?고용 창출 등 소극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노후 준비가 안 된 노인들은 차례차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정년연장 및 임금체계 개편 등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 적극적으로 정책화해 나가야 한다"며 "하지만 정부는 기업 등 사회적 저항을 일으키는 이 방식보다는 장려금 지급 등 편한 정책들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생계비 절실한데 '봉사' 권하는 정부

50대 초중반에 퇴직하는 은퇴자들은 당장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가 절실한데 정부가 만드는 일자리 정책은 빈곤계층에 대한 수혜형 혹은 전문직 퇴직자의 봉사형 일자리에만 머물러 있다.

2010년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가구주가 50대인 가구의 월 평균 지출액은 280만3,000원, 60대는 148만7,000원에 이른다. 60대 가구주의 경우 자녀 결혼비용이나 갑작스러운 의료비를 제외하더라도 월 평균 150만원 정도의 소득은 있어야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가 만드는 일자리는 여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노인일자리인 초등학교 급식도우미, 숲생태ㆍ문화재 해설사 등의 월 급여는 20만원에 불과하고, 노(老)-노(老)케어 등도 월 급여가 20만~30만원밖에 안 된다. 노인이 민간기업에 취업해 스스로 자립하도록 하겠다는 시니어 인턴십(상점판매원, 물류관리 등), 고령자 친화형 전문기업, 시니어 직능클럽(전문직의 경륜나눔형 일자리) 역시 업체에서 받는 임금과 정부 지원금을 합한 월 평균 급여가 54만~74만원에 불과하다. 전문직 은퇴자가 재능기부를 하도록 한 고용노동부의 사회공헌형 일자리 역시 일일 차비와 식비가 8,000원, 활동비가 시간 당 2,000원에 불과한 상태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2010년)에 따르면 고령 임금근로자(55~79세)의 49.7%가 '생활비 등 당장 수입이 필요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노인들의 '경륜 나눔' '재능 기부'라는 명목으로 봉사형 일자리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고령화가 굉장히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정부는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단기 일자리만 만들어내고 있다"며 "한국의 노인 빈곤율(소득이 중위소득의 50%에 못 미치는 비율)은 45%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을 3배나 웃돌 만큼 심각한데 정부가 적극적인 고령화 대책을 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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