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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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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43>

입력
2012.05.2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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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길에서 주운 것이니 너희 재물이다. 내가 무슨 상관이냐?

스님께 은혜를 갚고자 길을 나섰다가 이틀째 되는 날에 이 궤짝을 얻었으니 하늘의 뜻임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원컨대 스님은 거절하지 마옵소서.

절집의 사람들 모두, 저들의 말이 그럴듯하다며 스님이 받아야 된다고들 했다지요. 스님이 받아서 궤짝을 열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그 속엔 황금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스님은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옥토를 사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어 부자가 되게 하고 절반은 해인사에 큰 불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신이 이야기를 끝내자 동이 어멈은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씻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은 은혜를 갚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래요? 저는 주인어른께 심려만 끼치고 이제 또 도련님까지 한양으로 떠나신다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부모님이 누구신지 아시나요?

동이 어멈은 희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유 생원 댁에 제가 여섯 살쯤에 들어갔어요. 듣기로는 흉년에 인근을 지나던 유랑민이 돈 열 냥을 받고 저를 남기고 갔다고 합니다.

그럼 그때부터 큰어머니 몸종을 하셨어요?

그 댁 막내 도련님이 갓난애여서 아기를 돌보는 업저지를 했습니다.

동이 어멈은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버님께는 집 떠날 말씀을 올렸습니까?

예, 과거를 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제가 소과도 치르지 않은 터에 어찌 대과를 치르겠으며, 소과에 붙는다 할지라도 곧 관향이며 집안에 대한 조회가 따를 터인데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동이 어멈은 어려운 이야기임에도 주인의 사정을 젊어서부터 잘 알고 있어서 곧 눈치를 챘다.

도련님은 그냥 집을 떠나실 작정이구려. 모두 이 어미의 죄입니다. 주인어른께도 평생 짐만 되었지요. 이제 금산댁이 아기를 낳을 텐데 굳이 나가야 되겠습니까?

이신은 동이 어멈과 오래 이야기할수록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서 한마디만 하고 일어날 태세였다.

곧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노심초사하지 마세요.

동이 어멈은 장롱을 열더니 무엇인가 수건에 꽁꽁 싸맨 것을 풀어헤쳤다.

도련님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나 나는 아마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르오. 이걸 저라고 생각하고 꼭 간직해주어요.

동이 어멈이 내민 손수건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향목 염주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제가 도련님을 낳고 다시 덕이 아씨를 낳았을 때 아씨마님 상심이 크셔서 매를 때리고 저를 내쫓았던 적이 있습니다. 주인어른께서 하인에게 안내하도록 하여 속리산 경업대 관음암에서 한 철을 보냈지요. 아씨마님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랍니다. 어느 날, 암자 아래 골짜기에서 맞춤한 향목 등걸을 보았기에 자기를 달랠 겸하여 이것을 깎았습니다. 꼭 석 달 열흘이 걸렸어요.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으나 이것만은 내 자식들에게 꼭 주고 싶었지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신이의 손목에 염주를 채워주었다. 나중에 덕이도 동이 어멈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같은 염주를 받았다. 이신은 일어나기 전에 동이 어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 이름을 한번 불러주십시오.

어찌 제가 감히…….

동이 어멈은 침묵했고 그는 기다리다가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이신이 돌아서서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지방에 팔을 얹은 채로 그녀가 흐느끼듯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신아, 내 새끼야!

이신은 날밤을 새우고 멀리서 산사의 범종 소리가 들릴 무렵에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금산댁은 식구들 누구도 깨우지 못하고 미투리를 끌며 오리정 부근까지 남편을 배웅했고 이신도 그의 아내도 서로 작별의 말조차 없었다. 그냥 신이 잠깐 멈춰서 어둠 속에 서 있는 금산댁의 희부연한 자취만 잠깐 바라보고는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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