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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백수 시대/ <상> 비참한 노인 구직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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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백수 시대/ <상> 비참한 노인 구직 현실

입력
2012.05.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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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스펙도 무용지물… "68세만 되면 취업이 거의 불가능"

일자리를 찾아 나선 노인들의 하소연은 절규에 가까웠다. 한국일보는 이달 15~25일 서울 곳곳에 산재한 고령자취업알선센터, 구청 복지센터 등에서 노인 구직자 103명을 심층 면접조사했다. 생활고와 만성질환으로 이미 삶의 한계선상에 놓인 노인들은 4가지 높은 취업 장벽 탓에 좌절을 거듭하고 있었다.

70세 넘으면 아예 자리조차 없어

노인 백수들은 해를 넘길수록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젊은 시절 봉제관련 수출업체에서 일했다는 강대식(71ㆍ이하 가명)씨는 "2년 전에는 그래도 교육 받고 구직 등록을 하면 몇 군데서 연락이 왔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갈수록 구직 기간이 길어진다"고 말했다. 직업군인 출신인 김성순(73)씨는 "군에서 기술을 배워 자동차, 보일러 수리도 가능하지만 내 나이 대는 아예 찾지를 않는다"고 한탄했다. 보험세일즈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김한우(81)씨 역시 "노인 일자리 안내문을 보고 찾아가면 예외 없이 60대 초반에서 끊어 버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방자치단체 취업센터 직원들도 연령차별을 절감하고 있다. 서울 종로취업알선센터 관계자는 "실제 구직전선에 나선 노인들은 70세 이상이 많은데 구인 기업은 죄다 50, 60대를 원한다"며 "체력은 나이와 반비례한다는 고정관념 탓에 연령만 보고 거절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전했다. 용산센터 관계자는 "사실 68세만 되면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며 "어떤 70대 어르신은 (취업이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도) '얼굴 도장이라도 한 번 더 찍겠다'며 들르시는데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가능한 일자리는 모두 박봉에 단순직

과거에 무슨 일을 했건, 어떤 능력을 지녔건 노인 백수들에겐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방송국 드라마 성우를 했던 유운성(77)씨는 요즘 구청을 통해 얻은 월 20만원짜리 도시락 배달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 베이징의대 연수 후 침구사 자격증과 웃음치료 1급 자격증을 땄고, 10년 전부터 청각장애를 앓으며 수화를 배워 수화교사로도 활동했을 만큼 다재다능 한 노인이다. 유씨는 "성우 경력을 살려 어린이들 대상의 인형극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많고 귀도 안 들린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며 "인형극에 무슨 질문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아쉬워했다.

지금은 비록 이혼 후 노숙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재훈(64)씨는 한 때 시와 수필을 쓰던 작가였다. 그는 현재 구청 취업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월 80만~10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물론 희망사항일 뿐이다. "100만원 가까운 임금을 주는 일자리는 대부분 내 체력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요. 살아오면서 했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학교나 문화센터 강사 같은 일을 원하는데…"라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젊은 시절 사업을 했다는 김용덕(68)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박봉에 단순직만 주어지는 게 불만이다. 65세가 넘으면서 받아주는 곳이 없자 최근에는 지하철 택배 일을 할까 고심 중이지만 조건이 성에 차지 않는다. 그는 "지하철 택배 일을 하면 전화비로만 한달에 7만~8만원이 든다는데, 이것 저것 빼고 나면 월 40만~50만원이 고작이라더라"며 우울해 했다.

자식 소득 있다고 복지혜택 차단

노인 백수들의 생활고에는 복지수급을 차단하는 행정의 벽도 한몫하고 있다. 김경호(75)씨는 16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당뇨 합병증으로 집에 누워있는 장남을 돌보고 있다. 초등학교 급식을 나르며 받는 월 20만원이 수입의 전부지만, 농협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월 20만원씩 주는 용돈 탓에 기초수급자 신청자격이 안 되는 실정이다. 그는 "월 40만원으로는 장남과 내 약값(고혈압 및 전립선질환) 대기도 빠듯하다"며 "월 30만원짜리도 좋으니 제발 일 좀 더하게 해달라"고 울먹였다.

종로취업알선센터 관계자는 "사실 소득은 거의 없는데 부동산이 조금 있다거나 과거 저축 보유 기록 때문에 국민연금의 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이 많다"며 "이런 사람들이 취업 측면에서도 실질적인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악덕 사업주 횡포에도 속수무책

결국 노인을 고용하는 주체는 기업이지만 현장에선 "기업들이 좀체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영일(62)씨는 "이 달 들어 면접만 4번을 봤지만 4대 보험조차 안 되는 곳이 수두룩했다"고 말했다. 특히 용역업체들의 경우 퇴직금을 안 주기 위해 1년 이내로 촉탁하고 1년쯤 되면 무조건 해고하기 일쑤라는 게 이씨의 경험담이다. 그는 "실제 지급하는 것과 상부에 보고하는 임금이 다른 경우도 많고, 하루 아파서 쉬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잘린다'"고 하소연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김예원 인턴기자(이화여대 영문학과 3년)

채정기 인턴기자(숙명여대 일본학과 4년

■ 고학력 고령 구직자 만나보니

심각한 구직난은 경력이 변변찮은 노인들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정부 기관의 4급 이상 간부, 상장기업 임원급, 금융계 지점장급 경력을 지닌 고급인력도 퇴직 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일보는 중견전문인력고용지원센터에 의뢰해 능력에 걸맞은 일자리를 찾고 있는 고학력 고령 구직자들을 인터뷰했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23년간 재직하다 퇴직한 정모(56)씨. 박사과정을 수료한 학력에 영어와 일본어까지 가능한 화려한 '스펙'을 지녔지만 5개월 구직기간 동안 면접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는 "희망연봉(5,000만원)이 높아서인지 좀처럼 기업 쪽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구직활동을 하며 취업센터 교육과 각종 동아리 활동, 컨설팅도 받아봤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는 특히 각종 노인 채용박람회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정부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것 같은 분위기이고, 참여한 기업들도 대부분 영세한 수준이라 채용여력이 거의 없어 보이더군요." 그는 "대다수 노인들이 '맨 땅에 헤딩' 식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다"며 취업센터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취업자의 능력과 기업의 수요를 파악해 가급적 일대일 면접을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방송사 PD로 33년간 일하다 퇴직한 정모(61)씨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퇴직 후 1년간 문화센터 강사로 일했고, 지금은 5개월째 조건이 더 나은 일을 구하는 중이다. 그는 "미디어 분야 종사자들이 퇴직 후 갈 곳이 너무 없다"며 "비록 보수가 낮은 비정규직이라도 언론계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형 증권사에서 일하다 작년 2월 퇴직한 강모(55)씨는 "나름 괜찮은 일자리가 나오긴 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강씨는 "이미 퇴직한 마당에 고액 연봉은 꿈도 꾸지 않는다"며 "임금보다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종이 중요한데, 정부의 일자리 대책은 너무 전시성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업 임원 출신의 김모(56)씨는 기계 분야의 해박한 전문지식과 풍부한 경험이 무기. 하지만 백수 생활이 벌써 3년째다. 중소기업 전문경영인 자리에 지원해봤지만, 요즘은 자신과 비슷한 임원 경력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 수요보다 공급이 훨씬 많은 실정이다. 그는 "중소기업들도 가급적 젊고 다루기 쉬운 인력을 원하는데다 중소기업 특유의 문화나 사내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대기업 임원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비원 같은 단순직종도 시도해봤지만 오히려 화려한 이력이 걸림돌이 됐다. 김씨는 "정부가 '일자리 몇 만개 창출' 식으로 양에만 집착하지 말고 실제 현장에 나와 노인들이 어떤 일자리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해 정책에 반영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채정기 인턴기자(숙명여대 일본학과 4년)

김예원 인턴기자(이화여대 영문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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