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은 종종 미개한 전쟁에서 벌어졌다. 나중에 초패왕(楚覇王)이 되는 항우가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향한 거침없는 진격에서 항복한 진나라 포로 20만을 생매장한 사건도 그랬다. 포로들을 초군에 편입시켜 쓸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진나라 출신인 그들을 진나라 수도를 공략하는 작전에 쓰기는 꺼림칙했다. 군량도 문제거니와, 그들의 반란 가능성도 골치였던 것이다. 결국 포로를 모두 생매장해 버리는 멍청한 대학살이 자행됐다.
■ 칭기즈칸에게 학살은 일종의 '공포 전술'이었다. 그는 항복하면 관용하되, 모욕하거나 저항하면 '피로 청소한다'는 살벌한 원칙을 관철했다.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왕국은 칭기즈칸의 무역상들을 몰살하고, 타협을 위해 파견한 사신들까지 죽였다. 전투 중에 손자까지 전사하자 칭기즈칸은 호라즘의 최후 거점인 힌두쿠시산맥 너머 바미얀 진격에 앞서 "모든 생명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미얀은 물론 호라즘왕국 전체가 초토화해 누적으로 수백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전한다.
■ 하지만 전쟁 중의 학살은 개명된 근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은 전술적 필요성이나 야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이한 이념으로 뒷받침됐다는 점에서 마성(魔性)을 느끼게 한다. 보스니아 내전은 종교전쟁 패턴을 답습하면서 '인종청소'라는 광적인 학살극으로 이어졌다.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얼마 전 국제재판소에서 유죄평결을 받았지만, 수단과 콩고 등 아프리카에서는 오늘도 국지전과 맞물린 종족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지난 25일 시리아의 소도시 훌라에서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 친위 무장조직인 '샤비하'가 하룻밤 새 어린이 30여명을 포함해 주민 10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 자행됐다. 이른 저녁에 반정부 시위가 있은 뒤 정부군이 훌라를 무차별 폭격했고, 총칼로 무장한 샤비하들이 야음을 타고 집집마다 뒤지며 주민을 살해했다. 전쟁상황이 아닌, 민주화운동 탄압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광주진압' 비슷하지만, 어린이들까지 도륙한 건 충격적이다. 아사드 정권의 종말이 임박했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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