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51) 시인이 열 번째 시집 <북항> (문학동네 발행)을 냈다. 4년 만의 시집에서 시인은 꽃, 새, 벌레 등 농경사회적 소재를 의인화하면서 예의 활달한 상상력의 세계를 펼친다. 이 세계에서 벚꽃의 낙화는 코끼리와 벚나무의 교접으로 태어난 어린 코끼리들의 투신으로 화하고('벚꽃'), 두더지는 세상을 등지고 땅 속에 들었다가 '땅강아지의 값비싼 비단 치마와/ 달팽이의 탐험 모자를 채굴해' 거부가 된다('두더지'). 북항>
일주일 만에 집필실을 찾아 마루 위의 박쥐 똥을 쓸면서 시인은 걱정한다. '나한테 똥 눌 자리를 빼앗겨버린 박쥐는 벽에 납작 달라붙지도 못하고 밤새 얼마나 똥자루가 먹먹할까'('박쥐 똥을 쓸며'에서) 담뿍한 유머가 웃음을 빼물게 한다.
수록시 '설국(雪國)'은 아예 독자의 웃음보를 정조준한다. 세도가임이 분명한 시적 화자는 지시했던 호랑이 사냥이 실패하자 '드는 칼로 눈 내리는 북악의 밑동을 싹둑 잘라서' '동해로 내던지라는' 영을 내린다. 이 호방한 환상은 장독에서 김치를 꺼내오라는 아내의 부탁으로 깨진다. '신발 끌고 마당에 나와 북악 쪽을 바라보았으나 기별은 감감하였다. 김칫독 속으로도 눈발이 자욱하게 몰려들었다.'
시집에는 '설국'처럼 의고체로 쓰여진 작품이 여럿이다. 조선 실학자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속 내용을 시로 옮긴 '표절'의 첫 연은 이렇다. '가을날 그는 방에서 오건(烏巾)을 쓰고 흰 겹옷을 입고 녹침필(綠沈筆)을 흔들면서 바다에 노니는 물고기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문인화를 시로 옮긴 듯 유유자적하다. 이런 옛말투는 시인에게 새로운 형식적 시도인데, 현실과 긴장감 있는 거리를 유지해온 그의 시와 잘 부합한다. 이목구심서>
자연을 무대로 하되 시인의 서정은 뻔한 자연주의에 머물지 않고 갱신을 거듭한다. 옥수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과정에서 탄생한 시 '파종의 힘'에서는 옥수수의 신생에 자신의 쇠퇴를 포개며 기상천외한 서정을 발산한다. '여러 날이 지난 뒤 땅속에 숨어 있던 새가 연둣빛 부리를 내밀었다/ 이 뾰족한 부리들이/ 내 무릎을 쪼아 먹고 내 허리를 쪼아 먹고 내 눈썹을 쪼아 먹는 날이 언제일까 궁금해하는 동안 내 머리카락은 수시로 서걱거렸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부조리한 현실이 미학적 갱신의 동력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허공에 송송송 구멍을 내'다가 신의 분노를 사서 두 팔이 잘린 궁사를 통해 시인은 식어버린 열정을 되새긴다. '그때부터였다 팔짱을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그들이 한때 명궁(名弓)이었다는 말이 있다'('명궁'에서) 그가 명성에 안주하지 않는 시인임을 방증하는 시집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