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 최초의 민주정부를 꿈꿨던 이집트 국민의 열망이 꺾일 위기에 놓였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23, 24일 치러진 민선 대통령 선거 결과 종교에 토대를 둔 이슬람원리주의 후보와 구 정권을 대표하는 인사가 최종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누가 대권을 거머쥐든 개혁과 변화라는 이집트 민중의 염원과는 거리가 먼 시나리오다.
알자지라방송은 26일(현지시간) "무슬림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61) 후보와 전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아흐메드 샤피크(71) 후보가 각각 25.3%(잠정), 24.9%의 득표율로 1, 2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공식 선거결과는 27일 발표되며,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내달 16, 17일 결선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결과는 당초 예상을 빗나간 것이다. 그 동안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다퉜던 암르 무사(76) 전 아랍연맹(AL) 사무총장과 온건 이슬람주의자 압둘 무님 아불 푸투(61) 후보는 4, 5위로 뒤쳐졌다.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무르시는 원래 무슬림형제단이 대선 후보였던 카이라트 알 샤테르 전 국회부의장이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대타로 나섰음에도 무난히 1위를 꿰찼다.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마지막 총리 샤피크도 신 권력의 출현에 위협을 느낀 기득권 세력의 결집 덕분에 결선투표 진출에 성공했다. AFP통신은 "유권자 5,000만명을 대상으로 전국 단위의 선거가 진행되면서 인력동원과 자금확보에 유리한 조직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분석했다.
결선투표는 일견 이슬람주의 대 세속주의의 대결 구도가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무르시는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무슬림형제단의 대표 주자고, 샤피크는 친미ㆍ친서방을 표방한 무바라크의 계승자다. 문제는 국민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화의 욕구를 대변할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두 후보는 신구 세력의 차이만 있을 뿐 각각 이슬람(무르시)과 압제(샤피크)를 상징하는 보수 성향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무슬림형제단의 득세가 변수다. 무슬림형제단은 정당 조직 자유정의당(FJP)을 내세워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실시된 상ㆍ하원 선거에서 의회 권력의 47%를 차지했다. 형제단이 의회에 이어 행정부마저 장악하면 내달 말까지 권력을 이양키로 한 군부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952년 쿠데타 이후 권력 위에 군림해 온 군부가 이집트의 이슬람화를 눈뜨고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반미 색채가 강한 무슬림형제단의 부상은 종교적 극단주의를 극구 경계하는 미국에도 부담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을 반드시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국제 선거감시단의 일원으로 이집트 대선을 지켜 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일부에서 폭력과 부정 의심 사례가 발생했고 투표율(50%)도 낮았지만 민주적 투표로 첫 지도자를 뽑는, 선거의 권위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아랍민족주의와 시민혁명 계승을 앞세운 함딘 사바히(68) 후보의 3위(21.5%) 돌풍도 적지 않은 소득이다. 좌파 진영의 사바히는 이집트 제1, 2 도시인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득표율 1위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타레크 마수드 미 하버드대 교수는 "결선투표 후보들의 지지율이 50%에 미치지 못한 것은 거꾸로 이집트 국민의 절반은 이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라며 "개혁ㆍ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참여 여지가 그만큼 커졌다"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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