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의 얘기책 읽기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집 행랑채에서만 읽더니 밖으로 소문이 나면서 일테면 농군 두레패들의 사랑에도 불려갔는데, 모두가 상민들이라 남녀노소가 어울려 한쪽에서 새끼 꼬고, 짚신 삼고, 자리 짜면서, 또는 물레 잦고, 바느질하면서 신이의 낭독을 들었다.
노비 쟁송이 일어난 뒤에 이신은 마음이 떴는지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속리산 법주사의 사자암에 틀어박혀 있었다. 혼자 글을 읽겠다고 했지만 이지언은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혼인을 시키기로 결정하고는 송생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그는 신이를 막무가내로 끌고 내려올 수도 없어서 사실대로 얘기해주고야 말았다.
형님의 혼처를 정한 모양입디다. 금산 처자라구 하는데 나두 먼발치서 본 적이 있소.
신이는 픽 웃더니 말했다.
내가 장가를 든다고 달라질 일이 무에 있겠니? 인연이란 모두 맺고 끊어지고 부질없는 짓인데.
마치 출가한 중처럼 말하는구려.
꼭 중이 되어야 그런 소리를 하는 것두 아니다. 머리 깎고 승복 입고 그것두 행색에 지나지 않으니. 아무튼 어느 가엾은 처자가 이 그물에 걸렸는지 봐두어야겠네.
금산에 초행을 갈 적에는 송생이 함잡이를 섰고 상객으로는 그의 아버지 송 초시가 나섰다. 가마꾼은 집안 하인들이었지만 짐꾼이며 후행은 안면 있는 동네 젊은이들이 따라갔다. 이신은 대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맞기 전에 좌중이 권하는 술 이외에도 스스로 줄기차게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항아리를 옆구리에 끌어다놓고 조롱박으로 떠서 벌컥대며 마셨다. 신부는 먼저 신방에 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족두리 쓴 채로 벌을 서고 앉았는데 신랑은 대취하여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고, 송생이나 동네 젊은이들은 함께 술 마신 것이 면구스러울 정도였다. 술상머리의 멍석에 널브러진 신을 동무들이 떠메어 억지로 신방에 밀어넣었는데 곧이어 그의 드높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에 이미 그 혼인의 불안한 결말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고 송생은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 덕이는 올케가 참으로 무던한 이였다고 회고했다. 이신이 장가들고 나서 다시 절집으로 올라가버린 뒤에 그녀의 처신은 집안 식구들이 말하지 않았어도 서로가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금산댁은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채의 이지언에게 먼저 문안 인사를 올리고, 행랑채에서 이제는 겹집의 뒷방으로 옮겨온 동이 어멈에게 가서 인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는 집에서 인도하는 대로 시어머니 없는 집안의 안방에 들어앉았다가 남편에게 방을 바꾸자고 말을 꺼내 보았지만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금산댁은 남편의 밥상을 들여보내고 동이 어멈과 시누이 덕이와 자신의 밥을 차려 뒷방에 가서 꼭 함께 아침을 먹었다. 신이 산사로 올라간 뒤에도 금산댁의 행동은 늘 똑같았다. 동이 어멈을 위하여 누비옷도 해드렸고 친정에서 가져온 산토끼 털을 댄 배자도 해 올렸다.
봄이 되었을 때, 불쑥 산에서 내려온 이신은 부친 이지언에게 한양에 올라간다는 말을 꺼냈다. 뭣 하러 가느냐니까 전에 아버님이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공부를 해보라지 않으셨느냐, 그냥 치러보고 벼슬길에만 나가지 않는다면 별로 실망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도 말했다. 이 의원은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신이 집을 떠난 두 해 뒤에 동이 어멈은 세상을 떠났고, 이지언은 천지도인들의 삼례대집회가 있던 그해에 돌아갔다. 이신이 길 떠날 차비를 하자 아내 금산댁은 말없이 버선을 여러 켤레 만들었고 새 옷 한 벌과 두루마기를 장만했으며 길양식으로 미숫가루와 인절미를 준비했다. 떠나기 전날 밤에 이신은 아내에게 꼭 한마디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뜬금없이 처갓집 마당의 석류나무가 참 좋더라고 했다. 그가 혼인차 초행을 갔던 것이 가을이었으니 석류가 벌어져 있을 즈음이었고, 그 얘기를 들으니 금산댁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이고 느닷없이 친정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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