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국내 프로야구에서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은 선수는 이종범(42)밖에 없었다.
'이종범이라 쓰고 신(神)이라 읽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가 남긴 발자취는 깊고 뚜렷했다. 광주 서림초등학교 3학년이던 1979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야구를 시작한 이종범의 천재성이 본격적으로 돋보이기 시작한 건 건국대학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대학 2년 선배인 송구홍 LG 코치는 "입학하자마자 전국 대회에서 당대 최고 투수였던 고(故) 박동희의 155㎞ 짜리 강속구를 때리며 단번에 국가대표가 됐다"고 떠올렸다.
일본프로야구 주니치(1998~2001년)에서 뛴 기간을 제외하고 그가 한국에서 16년간 남긴 성적은 타율 2할9푼7리(6,060타수 1,797안타)에 194홈런, 730타점, 510도루, 2,777루타 등이다. 전성기 시절 4년을 일본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양준혁(전 삼성)의 기록을 대부분 갈아치웠을 것이 유력하다. 지난해 은퇴한 양준혁도 "나는 타격만 잘 하는 선수였던 반면 이종범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다"고 인정했다. 93년 해태에 입단한 이종범은 '공수주 3박자를 갖췄다'는 '평범한'평가를 비웃으며 '바람'의 탄생을 알렸다. 정규시즌에서 타율 2할8푼에 16홈런, 73도루를 기록하며 팀을 정규시즌 1위로 이끌더니 7차전까지 치러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3할1푼에 도루 7개로 삼성을 뒤흔들었다.
이종범은 이듬해 '만화 같은'시즌을 보냈다. 124경기에서 타율 3할9푼3리에 196안타, 84도루를 기록했다. 8월21일까지 4할을 쳤던 이종범은 시즌 막판 200안타와 4할의 갈림길에서 아쉽게 모두 놓쳤지만 믿기 힘든 성적이었다. 슬러거와는 거리가 먼 체구였지만 엄청난 배트 스피드로 97년엔 30홈런을 때리는 등 96년부터 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도 기록했다.
97년 LG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홈런 3방을 쏘아 올리며 세 번째 우승 반기를 낀 이종범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한신 투수 가와지리에게 사구를 맞은 이후로 몸과 마음고생을 하다가 2001년 친정으로 돌아 왔다. 복귀후 그는 20대 시절에 육박하는 성적표를 냈으나 2006년을 기점으로 하락세를 걸었다. 그 와중에도 2009년엔 통산 10번째 우승컵과 입맞춤을 했고, 2006년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주장으로 뽑혀 일본과의 3차전에서 결승 2타점 2루타를 때리며 한국의 4강 신화에 앞장섰다.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기록 중에서도 독보적인 건 1회 선두 타자 홈런이다. 부동의 톱타자였던 그는 1회초 선두 타자 홈런 20개, 1회말에는 22개를 때려 이 부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밖에 통산 최소 경기 1,000안타(779경기), 사상 첫 3할-30홈런-30도루(0.324-30홈런-64도루ㆍ1997년), 1경기 최다 도루(6개), 연속 도루 성공(29회ㆍ1997년 5월18일 쌍방울전~6월27일 LG전) 등 수두룩하다.
성환희기자 hhs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