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불교를 믿는 이들이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최고의 깨달은 자로 받드는, 카필라 국의 왕자요 구도자가 된 고타마 싯다르타가 기원전 7세기에 태어난 날이다. 불교의 가장 큰 축일이지만 승려의 도박과 정풍운동으로 한국 최대 종파인 조계종은 뒤숭숭하다. 왜 수행에 나선 이들이 타락을 하는가. 진짜 부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 초기불교 연구자로 첫 손 꼽히는 전재성(59) 박사를 만났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과 쾰른대학에서 불교의 초기 경전인 빠알리 불경을 연구한 그는 빠알리어로 기록된 초기불교 대장경인 니까야를 가장 많이 원문에서 번역한 번역자로도 유명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이다.
_원적 연구에 따르면 4월초파일이 부처님이 태어난 날은 맞습니까?
"남방(빠알리어 초기 불교경전을 믿는 나라는 주로 남방이다)에서는 음력 1월 보름이 부처님 태어나신 날이자 출가한 날, 깨달은 날, 열반한 날이에요. 우리나라로 치면 5월 보름에 해당하지요. 북방에서는 탄생일 출가일 성도일열반일이 다 달라요. 역사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빠알리어 대장경인 <니까야> (부처의 언행과 일생이 제자와의 문답형식과 시문으로 담긴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문학으로만 평가되는 <라마야나> 나 <바가바드기타> 와 달리 <니까야> 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그 기록이 사실로 인정되어 인도 역사에까지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편입됐지만 그런 기록은 없어요." 니까야> 바가바드기타> 라마야나> 니까야>
_부처님은 왜 세상에 오신 건가요?
"부처님이 의도를 가지고 왔다면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거지요."
_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은 어떻게 하라고 가르쳤습니까?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법은 크게 네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자애관(慈愛觀).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겁니다. 누구한테 자비를 베푼다기보다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미움 증오 혐오 악하고 불건전한 감정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지요. 두번째는 무상관(無常觀)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서 성찰하는 거지요. 생겨나는 측면만을 보는 사람은 영혼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항상 무엇이 있다는 것만 보니까 현실에 집착하고 탐욕을 가지게도 되지요, 없다라는 측면에서 사람이 죽는 측면을 너무 강조하면 비관주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무상관은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다 보는 거에요. 흔히 불교가 모든 걸 무상하다고 하니까 허물어져 가는 것만 본다고 생각하는데 양쪽을 다 보는 게 무상관이에요. 그 다음으로 부정관이 있어요. 우리 몸을 더럽다고 보는 겁니다. 빠알리어로는 아쑤바라고 하는데 쑤바란 아름답다는 거고 아는 쑤바의 반대에요. 추하다는 거지요. 정확히 번역하면 불미관인 셈이지요. 우리가 탐욕에 빠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에 끌리기 때문이니까 탐욕을 끊기 위해 아름다움을 추한 것으로 봐서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_불교는 인생의 좋은 것을 추하다고 보고 그걸 외면하라니 이해하기는 힘드네요.
"그걸 뛰어넘으면 또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걸 불교에서는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 단계에 이르면 추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느껴요.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방부제가 들어있는 것이 깨끗한 더러움이라면 집에서 손수재배한 상추는 벌레 먹어도 더러운 깨끗함이잖아요. 그런 단계를 알게 되는 거지요. 그 다음에는 호흡관이 있어요. 자기 몸을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다른 것은 다 멈추고 호흡만 느껴지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호흡을 미세한 신체라고 했어요. 호흡을 들여다보면 일체의 생각을 잊어버리게 되고 마음이 평화롭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즐거울 때는 아무 생각이 없잖아요. 호흡을 관찰하면서 호흡마저도 잊어버리는 경지가 되는 거에요."
_방법은 역시 명상인가요?
"명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를 하는 거지요. 우리나라 불교가 참선을 한다고 해서 사유와 숙고를 빼버렸어요. 동작도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요. 부처님은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골고루 이야기했어요. 걸어다니고 서있고 앉아있고 누워있고 부처님이 특정한 자세를 강조한 거 아니에요. 스리랑카에서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참선해요. 자세도 한 가지를 오래 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 행주좌와 어떤 자세든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해요."
_수행은 왜 해야 하는 겁니까?
"쓸데없이 탐욕이 생기거나 욕망이 생기면 실존적인 존재가 위험에 처했다는 거거든요. 그걸 자각을 해야 돼요. 없애야 돼요. 그런데 그냥은 안 없어지지요. 부정관을 하면 없어지지요. 그리고 세상의 고통의 상당 부분은 누구를 미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잖아요. 자애관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천인공노할 사람도 행복하길 바라는 거냐. 그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어서 행복하길 바라는 거지요.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실천하기 힘들어요. 거의 모든 종교들이 불가능한 걸 실천하라고 해요. 그러면 그걸 가르치려는 사람하고 실천하려는 사람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이 생겨요. 가르치는 사람한테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불교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종교를 가르치는 거에요."
_그런데 최근 조계종 사태만 봐도 절에서 가르치는 게 꼭 그런 아니에요.
"초기 불교가 뿌리라면 대승불교는 가지나 꽃인데 근본적인 가르침을 잊어버려서 그래요.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부처님을 신격화해서 신격화에 의존하는 가르침이지요. 소승불교의 가르침은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이에요. 그래서 소승불교를 배운 사람은 철학박사학위를 주지만 대승불교를 한 사람은 문학박사학위를 줘요.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 변질해서 권력과 결탁을 하니까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게 금강경이에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지요. 그런데 당시 그걸 쓴 사람을 밝히면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그걸 부처님 말씀이라고 한 거에요. 금강경 내용이 뭐냐면 깨달아서 얻을 것이 없다는 거에요. 왜냐면 초기불교에는 진리의 흐름에 든 사람부터 아라한까지 16가지 성자의 단계가 있어요. 이건 정신적인 단계인데 변질이 되면서 수행자 내부에서 계급이 생겼어요. 이걸 부정하느라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잘못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초기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런데도 이걸 부처님 말씀처럼 믿고 금강경을 모태로 여러 가지 불경이 나오게 됐어요. 이것 때문에 초기 불교 경전에 있는 굉장히 쉽고도 실천적인 방법들이 외면되어 왔어요.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라, 누구한테 자비를 베풀라, 이건 힘들어요. 그러나 상대방이 좋게 되길 생각해라, 이건 누구나 실천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인간이 세가지로 구성돼 있다고 했어요. 정신 언어 신체. 이게 긴밀히 연결돼 있어서 영향을 미쳐요. 정신적으로 누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면 언어도 달라지고 신체도 달라진다라는 거에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이렇게 쉽고도 연기성이라는 철학을 일러주지요."
_수행법 자체는 확실히 초기 불교방식이 쉬워 보이네요.
"수행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가 이해하기 쉽지요. 부처님의 가르침가운데 일체라는 것이 있어요. 시각과 시각의 대상, 후각과 후각의 대상, 촉각과 촉각의 대상, 미각과 미각의 대상, 이게 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삼라만상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건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진다고 해요. 이건 누가 봐도 틀린 말이잖아요. 세상이 다 자기마음대로 될 수가 있나요? 부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일상에서 벗어나면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_그러면 진짜 부처님의 뜻을 따르려면 어떻게 하는 거에요?
"우리나라는 부처님 원래 뜻을 따르려는 초기불교를 소승불교 열등한 불교라고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했어요. 조사선이라고 중국의 선승을 부처님 머리꼭대기로 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진짜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원래 처음의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해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국민학생도 따를 쉬운 가르침이면서도 여든살 먹은 노인도 하기 힘든 가르침이에요. 이걸 모르면 너무 많은 방황을 하게 되는 거지요."
_<니까야> 는 다 번역이 됐습니까? 니까야>
"1999년부터 도법스님의 도움을 받아서 시작했어요. 차도 없는 양반이 무슨돈이 있겠어요. 주변에 보태라고 해서 여러 스님들이 도와주셨어요. 부처님과 제자의 대화는 거의 다 번역이 됐지요. 과거에도 일본어책에서 중역본은 나왔는데 부처님의 문답을 어느 것이 질문이고 어느 것이 대답인지구분을 하지 않아서 제자의 말이 부처님 말로 소개된 책도 있어요."
_<니까야> 번역하면서 부처님의 육성을 접해보면 우리가 알아왔던 부처와 무엇이 가장 다른가요? 니까야>
"부처님은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었어요. 병문안을 가면 환자들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하면 '네 나이에 병이 들어서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말해요.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기를 바란다.' 꼬살라에 빠세나다 왕이라고 할머니가 키운 왕이 있는데 이 할머니가 120살이 되어서 돌아가시는 데에도 너무 슬퍼하니까 부처님이 그래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바라문들은 큰 제사를 지내면 영생을 누린다, 하늘나라에 보내준다 그러는데 부처님은 진리를 이야기하니까 왕은 오히려 감복을 합니다."
_우리가 흔히 쓰는 불교용어에도 왜곡이 많겠네요.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게 많지요. 관세음보살은 아발로끼테수와라의 음역인데 아발로끼테는 보살피다 굽어살피다, 이수와라는 최상의 지배자라는 뜻이니까 기독교의 여호와 같은 하느님 같은 절대자 개념이지요.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 천개의 손과 눈을 갖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초기불교의 자애관을 인격화한 거에요. 대승불교가 힌두교의 절대신 개념을 다 넣어서 만든 개념이지요.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불도 다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오히려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대승불교에서 쓰는 '동체대비'(同體大悲) 같은 말도 우주가 한 몸이니까 자비심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는데 너무 형이상학이라 실천이 어려워요. 부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거든요. 제자가 '저기 불쌍하고 꾀죄죄한 사람이 지나가는데 어떤 마음을 내야 내가 죄를 짓지 않습니까' 묻지요. 불쌍하게 여겨도 올바른 마음은 아니거든요. 자기는 우월하고 불쌍하게 여겨지는 사람은 낮아지는 거니까. 부처님은 대답이 간단해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나도 한 때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라.' "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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