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민사 소송 건수나 무고 관련 고발 건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높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이는 반드시 우리 사회가 풀고 넘어가야 할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국가기관이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발생하는 사건도 적지 않다고 하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선진국의 관행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서 신약 개발이 어려운 것은 개발비가 엄청나게 드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국가기관인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의료 소비자인 환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정한 검사 기준이 아주 까다롭고 엄격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식약청이 국민 건강을 보호하겠다고 제시하는 심사 기준이라 관계자들은 이의를 못 달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기준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국민 건강 지킴이'라는 식약청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국민의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악명' 높기로는 미국 식약청(FDA)를 따를 기관이 없다. 신약 개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첨단 의료 기기 개발에도 미국 FDA의 감시 기능은 마찬가지다. 물론 행정부의 기능이며 권한이지, 사법부 소관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국내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선진국 진입이 요원한 것 같다. 국내 한의사가 최첨단 의료기인 초음파기를 임상 진단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의료법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헌법재판소가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주무기관인 식약청(KFDA)이 아니고 사법 기관인가. 그런데 듣자니 피부 질환 치료용 레이저(Laser) 기기를 놓고서도 최고 사법 기관인 대법원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필자는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이고 의대에서 임상 교육을 담당했기에 첨단 의료 기기의 개발 과정과 임상 적용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간단한 X선 검사 필름을 판독해 보겠다는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 CT, MRI 또는 초음파 영상 자료를 어쩌다 볼라치면 윤곽선이 큰 뇌, 심장, 신장 같은 큰 기관은 식별할 수 있겠지만 그 안의 미세한 부위를 판독한다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이다. 그만큼 영상 자료의 판독이 어렵다는 뜻이고,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는 말이다. 영상 자료의 판독 과정에서 드물긴 하지만 오진이 나오는 것만 봐도 이 의료 행위가 얼마나 높은 전문성을 요구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 임상 레이저 기기이다. 피부 치료용 레이저 기기의 종류는 아주 다양하지만 기종마다 생체물리학적 변수가 너무 많아 고도의 전문성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래 '일상 용어'화된 IPL 레이저 기기의 임상 사용을 놓고 한의사와 갈등이 있다고 한다. 쟁점은 IPL의 'L(Lightㆍ빛)'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한의사 측은 광선, 햇빛은 한의학에서 오래전부터 치유에 적용해 왔기에 한의사도 IPL을 환자 진료에 사용하겠다는 것이고, 피부과 전문의들은 IPL(Intense Pulsed Lightㆍ강한 순간적인 빛)은 엄청난 열에너지(칼로리)를 가지고 있는 빛이라 일반 광선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어린 시절 태양 광선 아래서 볼록렌즈를 가지고 종이를 불태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햇빛을 피부에 쪼이면 일반적으로 크게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같은 태양광이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강한 묶음 광선'이 되어 엄청난 열량을 지닌 '괴력 광선'으로 돌변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IPL 치료는 피부 화상을 일으키는 물리적 현상을 치료 효과로 유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전문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IPL 의료 기기의 유해성 판단을 식약청이 아닌 대법원이 내려야 한다는 현실이 암담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우리 사회에서 경찰저지선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과 같이 식약청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성낙 의학평론가·가천대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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