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북/칼 구스타프 융 지음ㆍ김세영 옮김/부글북스 발행ㆍ410쪽ㆍ2만5000원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1913년 10월 혼자 여행 떠날 채비를 하다가 환상을 겪는다. 북해와 알프스 산맥 사이 북부의 낮은 땅을 뒤덮는 대홍수다. 영국에서 러시아까지 온 유럽이 파편과 시체로 넘쳐났다. 이듬해 여름에는 무시무시한 추위가 온 세상을 꽁꽁 얼려버리는 꿈을 세 번이나 꾼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대전의 전조와도 같은 환상을 본 그 해부터 융이 자신의 환상 경험과 꿈을 마치 일지라도 적듯이 꼼꼼히, 그것도 16년 동안 해석을 곁들여 기록한 책이 <레드 북> 이다. 융 분석심리학의 핵심, 그 중에서도 '집단 무의식'이나 '원형' 같은 개념이 대부분 담겨 있다고 평가 받는 이 책은 그러나 융의 바람에 따라 사후 40년 동안 은행 금고에 보관된 채 공개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야 유족이 공개 결정을 내렸고 독일어와 영어 책이 나온 게 2009년이다. 국내 출간은 이 책이 처음이다. 레드>
어릴 적부터 환상 체험이 잦았고 노년에 황홀한 임사체험까지 해 일생 '신기' 넘치는 삶을 살았던 융은 책에서 신과 영웅,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엘리야와 살로메는 각각 융의 영혼을 안내하는 정신과 융이 억누르고 있는 여성성으로 나온다. 영혼의 본질, 사고와 감정의 관계는 무엇이며, 남성성과 여성성, 기독교,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지 등이 주제다. 악마가 등장하고 지옥이 무대가 될 때도 있어 어떤 대목은 섬뜩하다. '시커먼 물 위로 피 묻은 남자의 머리가 보인다.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고, 살해당해 떠도는 시신도 있다.…진득진득한 붉은 피가, 시뻘건 피의 냇물이 솟아올라 오랫동안 물결치다가 빠져나간다. 공포가 엄습한다.'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는 '광기로 보일 것'이라는 융의 말처럼 이 책은 난해하다. 한국에 융을 처음 소개했고 지금도 국내 융 연구를 이끌고 있는 이부영 한국융연구원장은 "일반 독자들이 읽어서는 황당해서 무슨 소리인가 할 테지만 융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과정을 아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석심리학에 정통하지 못하다고 해서 헤매기만 하다가 몇 쪽 읽지 못해 덮고 말 책은 아니다. 마치 고대 신화를 읽는 듯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들에 문학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체험한 사람의 문학적인 대서사시"로 볼 수도 있다. 융이 자신의 체험을 재현한 100여 장의 환상적인 그림도 볼 만하다.
아쉬운 건 책이 어려운 만큼 번역ㆍ소개 작업에 좀더 공을 들였더라면 하는 점이다. "난해해서 주석만 담은 다른 책 한 권이 필요할 정도"(이부영 원장)인데, 한국어 번역본에는 주석이 거의 없다. 2년 전 이 책을 번역해 낸 일본에서는 캘리그래피가 인상적인 원서 전체를 그대로 실어 보여주고 번역 글에 꼼꼼히 주석을 달았다(책 값이 50만원으로 너무 비싸지긴 했지만).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