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축복이자 저주다." 비교적 합리적인 사회로 평가되고, 개인간 평등의식이 널리 퍼져있는 서구에선 힘은 곧 책임이라는 인식이 하나의 공리(公理)로 돼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즐겨 관람하는 영화의 고전으로 이 있다. 스파이더 맨이 특출한 힘을 얻게 되면서 그 대가로 받았던 금언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한마디였다. 그는 사회정의를 위해 큰 힘을 마음껏 휘두르지만 그것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우정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축복이자 저주다"는 그의 마지막 독백은 후회나 한탄이 아니라 사회적 공리를 재확인하는 선언이었다.
영화에서의 슈퍼맨과 같은 능력은 사회적 의미로 본다면 지위와 명예, 재산 정도가 될 것이다. 지위와 명예는 곧 '축복이자 저주'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는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생긴 역사적 배경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재산 역시 다르지 않다. 신세를 망쳤다거나 골육상쟁을 벌이는 사적인 형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규범으로 '저주'가 강제되고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유럽 국가에선 도로주행 과속범칙금을 재산에 따라 각각 다르게 부과한다. 같은 도로에서 같은 과속운전을 했더라도 아예 봐주거나 몇 천원의 과징금을 매기기도 하고, 수 억원의 과징금을 물리기도 한다. 과속운전 한 번에 몇 억원의 벌금을 낸 부자도 있으니 재산이 축복이자 저주라는 인식은 사회적으로 정착돼 있는 셈이다.
최근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감된 정부 고위공직자는 평소 부하직원들에게 '4P 원리'를 자주 설파했다. "재물(property), 명예(pride), 지위(position) 3가지는 인간의 기본욕구인데 함께 탐하면 감옥(prison)에 가게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다. 그는 스파이더 맨 못지않게 큰 힘을 휘두르면서도 큰 책임에는 너무나 무관심하였다. 스스로 '사회적 공리'를 몰랐던 것은 아닐 텐데 그것이 '축복이자 저주'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사회에선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부터 누구나 갖고 있는 인식을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힘이 커질수록 축복 쪽에만 관심을 쏟는 경향이 많아 보인다.
19대 국회가 다음 주에 개원한다. 원래부터 큰 힘이 있었던 국회의원이지만 이번엔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이어서 그들의 힘은 더욱 커졌다. 동시에 국민의 인식과 눈높이는 많이 올라가 있어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지우고 있다. 결국 축복의 양은 더욱 커지게 되겠지만 자신의 의무와 희생을 감당하지 않았을 경우 사회와 국민들로부터 받게 될 '저주의 수위'도 그 만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예비 국회의원들을 둘러싸고 이렇게 심각한 잡음들이 일었던 경우가 별로 없었다. 큰 힘을 추구하고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없었거나 각오조차 하지 않는 당선자들이 도처에서 불거졌다. 언론에 부각된 사례만 해도 '논문표절 돌려차기' 당선자나 '제수씨 성폭행 의혹' 당선자가 있다. 그들은 큰 힘만 추구했지 큰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으로 불거진 몇몇 당선자들은 과거엔 큰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했는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말과 행태를 보면 큰 책임을 운운하기는커녕 큰 힘을 가질만한 자격까지 상실해 버렸다.
이들 뿐이겠는가.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가운데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회적 공리를 마음에 담고 있지 않은 부류가 적지 않을 것이다. 새로 시작되는 국회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축복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쩔 수 없이 사사로운 희망과 행복과 이익 따위를 희생시켜야 하는 '저주스러운 책임'도 그만큼 무거워졌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