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충격에 실신하거나 단기 기억상실에 빠졌던 자가 의식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나 소설 속의 판에 박힌 장면을 우리는 기억한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놓인 낯선 공간을 탐색한다. 천장과 벽, 집기들…, 하얀 시트가 깔린 철제 침대 속에 누운 환자복 차림의 자신. '아, 그런 일을 겪었지.' 환자는 으레, 회복된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시간들을 분절해가며 지난 상황을 재구성하고, 그렇게 그려낸 공간과 시간의 좌표 위에서 가까스로 일상 속으로 회귀한다. '이제 어떻게 하지?' 혹시 우리가 성취해온, 이성 혹은 판단력이라고 부르는 모든 정신적 작용의 첫 꿈틀거림이 저와 같은 공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철학의 기본 범주로서 시간과 함께 공간이 군림해온 것은, 그래서 지당해 보인다. 공간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 너머에 어떤 부가적인 차원도 허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어떤 배후조차 거느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아무리 부풀리거나 짜부라뜨려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장이다.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이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의 서문에 썼듯 인간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저마다 상이한 공간적 경험을 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간에 대한 관념을 갖게 마련"인 것이다. 시간과>
그런 관념들은 예술가에 의해 건축이나 조각, 회화 음악 문학 작품 속에 구현되기도 하고 문학 작품 속에서 상징의 견고한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렇게 구현된 공간이 다시 당대인의 정신 속에 스며 형이상학의 성채를 더욱 굳히는 데 헌신하는 예도 흔하다. 고대의 신전이나 중세의 종교 건축, 근대 이후의 미학적 공공건축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요컨대 공간적 사유라는 이름의, 상징을 통한 소통이다. 정신현상학자 후설이 했다는 말- 지각은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 그 양자의 관계 -을 편의적으로 끌어와 공간과의 대화 그 묵언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우겨볼 수도 있지 않을까. 화강암과 대리석, 철근콘크리트로 구획된 공간을 매개로 또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상징들을 매개로 우리는 공간과, 역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공시적ㆍ통시적으로 소통해왔다.
일상 속에서, 예컨대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도 공간화한 기억이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끊임없이 유년의 마을과 길과 집과 방들을 소환하는 까닭도, 추억이란 게 벌집 같은 공간 속에 특정의 시간들을 압축-공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 에서 한 말-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우리들이 오랜 머무름에 의해 구체화된 지속의 아름다운 화석들을 발견하는 것은, 공간에 의해서, 공간 가운데서인 것이다.-에 나는 수긍한다. 공간의> 잃어버린>
공간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관계에서 유리된 채 대상화하거나 진부한 비유 속에 갇혀 굳어져가는 경우도 많다. 한 편에 특권적 미학 공간으로 우뚝 선 소수의 고유명사들의 공간들이 있다면, 대다수 일상의 공간들은 고전 회화작품 속의 배경(근대 이전의 회화에서는 제재를 긍정적 공간, 배경을 부정적 공간이라 부른다고 한다)처럼 밀쳐져 버린 듯한 미심쩍음, 아니 안타까움이 치미는 것이다. 심지어 새로 살 집을 구하려 다닐 때에도 우리는 공간 자체의 성격이나 표정보다는 도배지나 장판 상태, 창 너머의 풍경을 먼저 살피고, 공간 형태와 배치보다 가구를 놓을 자리를 찾고자 줄자를 들이대기 일쑤다. 공간의 미학적 빈익빈 부익부는 물론 심화한 경제적 격차나 기능주의의 위세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적ㆍ문화사적 진단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사소한 원인들- 이를테면 습관이나 무관심 같은- 도 있지 않을까. 혹시 공간의 성격이나 표정에 대한 환기만으로도 우리가 누리는 이 가난한 공간의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예쁜 도배지와 액자로 벽을 치장하고 값비싼 가구와 공산품들로 공간을 채우는 식의 '인테리어'가 아니라 텅 빈 공간 자체의 가치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하는 인식 정도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 "침묵의 질이 사랑의 질"이라던 어느 소설가의 글에 고개를 끄덕이고, 한 시인이 작품 안에 담고자 했다던 '당당한 주저' 혹은 어떤 교향곡 속에 깃들인 덤덤한 휴지부에 뭉클해지는 때가 있지 않은가.
공간의 경시, 혹은 대상화가 비단 미학의 차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바빠 변두리 허름한 단칸 셋방과 그 공동체의 표정을 살피는 데 게을렀고, 검은 돈다발이 건네졌다는 빌딩 지하 주차장 혹은 교차로 건널목의 뻔한, 풍경 속에서 낯선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예컨대 저기 '벽(壁)'이 있다. 벽은 공간을 구획하고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장치다. 그리고 벽은, 거창한 담론가들이 말하듯 천부의 권리인 자유와 평등, 또 자유주의의 근간인 사적 소유와 자율적 개인을 존립케 한 가장 상징적인 물적 조건 가운데 하나다. 삶이 삶인 한, 아니 죽어서조차 우리는 공간성을 넘어설 수 없고, 그래서 벽 너머를 넘볼 수 없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실존적 진실이다.
그런 '벽'이 제가 지닌 생래적 의미보다는 차가운 비유의 맥락에 더 바삐 동원되고 복무해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장애의 메타포로, 극복의 상징으로, 별 생각 없이, 벽을 대상화해 왔다. 벽은 계몽주의의 근엄한 억압과 근대 시민윤리의 강박 안에서 안간힘 다해 넘어야 할 대상이었고, 허물어뜨려야 하는 속박과 단절과 불화의 상징이었다.
벽의 공간 상징이 어떤 시간의 결 위에서 우리의 인식 속에 굳어졌는지, 요컨대 진부해져 왔는지 해명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인간이 신의 속박과 신분의 운명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뒤 스스로의 재간과 분발로써 한때 운명이라고 불렀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운명이 된 뒤부터일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근대의 인간은 자유 너머에서 맞닥뜨린 자아의 벽, 집단의 벽, 새로운 계층 계급의 벽 앞에서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채찍질 당하며 벽과 불화하도록 부추김 당해 온 것인지 모른다. 원망의 대상, 극복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차가운 벽 안에서 우리의 삶의 공간 역시 하릴없이 조금씩 스산해져 왔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를 두른 벽을 기어코 벗어나야 할 누추한 자조의 가두리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벽 안에서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벽에 기대 휴식한다. 병들고 상처 입은 짐승이 찾아 드는 동굴, 아무도 편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야단 맞은 아이가 오직 제 서러운 흐느낌만으로 자신을 다독이는 다락방을 둘러싼 것도 벽이고, 여린 생명이 온전히 제 숨결을 갖출 때까지 지켜주는 것도 어미 뱃속의 벽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벽들을 부를 때, 이미 식어버린 '벽' 대신 '품'이라는 항온(恒溫)의 단어를 빌어 쓴다.
벽을 대상화한 것은, 공간 자체를 대상화해 온 우리의 근대적 가치체계, 사소하게 말하자면 둔해진 감각, 못마땅하게 밴 습관과도 관련이 있다고 나는 의심한다.
새 기획의 이름을 '공간 엿보기'로 정한 까닭이 대강 이러하다. 이 공간을 서러운 공간들을 위한 공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냘픈 소통의 양상을 엿보는 공간으로 삼고 싶다는 의미다. 모텔이나 로또방과 같은 욕망의 공간, 집 근처 공원 속 어느 구석자리처럼 그늘졌지만 아늑한 익명의 공간, 뜨거운 뉴스 속의 외로운 공간도 둘러볼 생각이다. 가끔은 동굴이나 자궁, 하늘과 같은 형이상학의 공간, 이름 없는 집이나 길모퉁이 가게처럼 소박한 보통명사들의 공간을 미학적 공간으로 소환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엿보기'라고 한 것은 가급적 그 공간에, 공간 안의 일상에 간섭하지는 않겠다는 의지 혹은 바람을 담은 표현이라 여겨주었으면 한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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