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북한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이갑수 김용수 일병 등 북한지역에 묻힌 한국군의 유해 12구가 6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는 한ㆍ미 양국의 긴밀한 공조체계가 작동했다.
미군 합동전쟁포로실종자 사령부(JPAC)는 북미합의에 따라 1996년부터 북한지역에서 미군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는데, 25일 봉환된 한국군 유해는 2000~2004년 진행된 발굴작업에서 미군 유해와 함께 발굴된 것이다. 1950년 11~12월 개마고원 남쪽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철수하던 유엔군이 압도적인 병력의 중공군에 포위돼 7,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다. 미국은 장진호 일대 등에서 수습한 유해를 2004년 하와이의 JPAC로 옮겨 미토콘드리아 DNA검사, 핵 DNA 검사, 치아검사 등을 통해 신원확인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2구가 아시아계라는 사실을 확인, 지난해 8월 한국 국방부에 통보했다. 유해가 묻혀있던 곳은 북한이 유엔군과 한국군의 유해만 묻었던 지역이라 이 유해들이 북한군이나 중공군일 가능성은 애초부터 배제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이후 하와이 JPAC에서 공동감식작업을 벌였다. 유해에서 채취한 DNA 샘플과 6ㆍ25전쟁 전사자 유가족 DNA 샘플 1만9,000여개를 비교했다. 김용수 일병의 경우, 지난해 84세로 사망한 김 일병의 형 용환씨의 DNA가 보관돼있어 유족들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유족 DNA 기록이 없었던 이갑수 일병이 유족을 찾은 것은 천우신조였다. 이 일병은 발굴 당시 미군 유해의 일부로 오인돼 반출됐다. 만약 한국군 유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미군 유해만 반출한다는 북미합의 때문에 아예 반출이 불가능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유해들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이 일병의 인식표가 발견되면서 유족찾기는 급물살을 탔다. 유해발굴단은 이 일병의 병적기록부를 확인, 호적지인 부산 중앙동으로 조사관을 급파했다. 10일 간의 탐문 끝에 이 일병의 아들 이영찬(65)씨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번에는 유족의 DNA 샘플을 먼저 채취한 뒤 JPAC의 유해들과 대조해 이 일병의 유해를 확인했다.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발굴 당시 많은 미군들의 유해와 뒤섞여 있었고, 유족의 DNA 샘플도 보관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일병처럼 유족을 찾은 것은 확률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밝혔다. 다만 이 일병의 유해는 일부가 여전히 북한지역에 묻혀있는 상태다.
비록 미국의 유해발굴작업을 통해 가능했지만 이번 한국군 유해 봉환은 북한지역에 남겨져 있는 미발굴 한국군전사자 유해 봉환의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함께 싸운 한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한미양국이 긴밀한 공조를 통해 본국으로 봉환한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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