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이 간 친구들만 불쌍하지. 죽도록 맞고 일만 했는디…. "
대법원이 1ㆍ2심 판결을 뒤엎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의 길을 연 24일 서울 암사동 자택에서 그 소식을 들은 여운택(89)옹은 15년(1997년~2012년)간의 소송 기록을 내보이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참 힘들었지. 감금 상태에서 야구방망이 같은 정신봉으로 맞아가며 온 종일 일만 했어. 하루치 식량을 사흘로 나눠 주는 통에 배고픈 기억밖에 나지 않아. 그래도 벽에다 저금 액수를 적어주면서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준다고 하니까, 그런 줄만 알고 손이 발이 되게 일했지."
여옹은 스무살이 되던 1943년 9월 '월급도 많이 주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일본 신문의 허위 광고를 보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가정 형편 때문에 이발사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터였다. 오사카 일본제철소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돈을 받기는커녕 모진 매질을 견디며 일만 해야 했다. 여옹은 "더러 도망간 사람들이 있었지만 잡히면 불구가 되도록 맞았다"며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고 말했다.
해방 직전 함경북도 청진의 분공장으로 끌려간 그는 "계약기간(2년)이 끝나면 임금을 모두 준다"는 제철소 말만 믿고 계속 일했지만 패전 직후 제철소 직원들은 일본으로 꽁무니를 뺐다.
1997년 12월 여옹은 미불임금 495.52엔(해방직전 1엔=담배 20갑)이 오사카 공탁소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돈의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본 오사카 지방법원에 냈다. 6년에 걸친 재판 끝에 법원은 1965년 한일협정 등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뒤늦게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돼 2004년 11월 일본 후생성에서 받은 후생연금은 고작 316엔, 우리 돈으로 4,700원이다.
여옹은 다시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우리 법원 역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판단했다.
"다 포기하고 있었지. 이 나이에 돈 욕심 때문에 소송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눈 감기 전에 후련한 일을 보네." 여옹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추후 재판결과가 달라지지 않는지 계속 물었다.
글·사진=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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