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인의 푸드 마일리지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떠들썩했다. 이는 식품이 어느 곳으로부터 왔느냐에 따라 마일리지를 부여하는 것인데, 먼 곳에서 온 것일수록 마일리지가 커지는 식이다. 이런 식품의 마일리지, 즉 푸드 마일리지는 식품 수송량에 수송거리를 곱한 수치로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게 따져보았을 때, 한국인 1인당 연간 푸드 마일리지는 톤당 7,085km에 이른다. 이 수치는 2001년의 5,172km에 비해 37% 증가한 것이다. 다른 나라의 푸드 마일리지는 같은 기간 모두 감소했다는데 오히려 우리는 늘어났다. 먹는 문제에 민감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국인의 푸드 마일리지는 10배 수준의 차이를 보인단다.
푸드 마일리지라는 것을 측정하려 한 본래의 의도는 식품을 수송하는 거리가 클수록 식품 소비에 따르는 에너지 소비의 크기를 헤아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푸드 마일리지는 곧장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먹거리의 질을 따지는 척도가 되어주기도 하고, 음식문화를 헤집어보는 의미심장한 상징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푸드 마일리지가 높다는 것은 '신토불이' 형 음식문화를 일깨우는 빌미가 된다. 또 좀 더 우아하게는 '로컬 푸드'로 우리 식단을 건강하게 바꾸자는 훈계 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다 그럴 듯한 말로 들린다. 가뜩이나 무엇을 먹고 사느냐의 문제에 혈안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푸드 마일리지 만큼 좋은 이야깃거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푸드 마일리지가 높다는 것이 그렇게 흠잡을 만한 일이라면, 그 흠은 정작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삐뚜름한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어쩌다 생선조림을 먹고 계산을 하려 물끄러미 바라본 벽에서 노르웨이산 고등어, 핀란드산 갈치 운운 적어놓은 원산지 표기를 볼 때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심란한 심정에 직면한다. 물론 북해의 깊은 바다에서 유영하는 고등어나 갈치의 눈부신 모습을 상상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뒤져 가장 싼 것을 찾아내 그것을 실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 때문이다.
푸드 마일리지는 밥상에 오른 식품의 원산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수치이기도 하지만 실은 노동자의 품삯을 줄이기 위하여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흔히 사람들이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도래할 수 있게 된 계기로 꼽는 것 가운데 두 가지가 바로 인클로저 운동과 곡물법 폐지이다. 곡물법 폐지는 영국인이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칭송한다는 로버트 필이라는 이가 곡물 가격을 일정하게 지키기 위해 곡물수입을 금지하던 것을 폐지한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 결과는 명쾌하다. 싼 곡물 가격으로 빵 값이 싸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빵 값을 낮춤으로써, 즉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할 생계비의 값을 떨어뜨림으로써 이윤을 늘리는 방법을 마르크스 같은 이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라고 불렀다.
당연히 푸드 마일리지는 현대 판 곡물법 폐지라고 할 수 있다. 곡물법 폐지가 영국이라는 산업 자본주의 제국이 일어나는데 박차를 가했다고 말했다면, 높은 푸드 마일리지 혹은 먹거리의 세계화는 역시 새로운 자본주의가 추진하는 신종 곡물법 폐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한 낮은 임금을 유지함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챙기려는 불평등한 세계의 추세일 뿐이다.
그것을 오직 먹거리 문화로만 바라보는 것은 세상의 상식과 많이 어긋난다. 경제만 으뜸으로 치고 문화는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 세상 이치라지만 실은 세상 일을 문화로만 읽고 경제는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 외려 더 흔한 일처럼 보인다. 경제의 힘에 유의하지 않은 채 문화를 분석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럴 때엔 문화를 평론하며 먹고 사는 일이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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