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여름 그리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테네의 식당을 들어가는데 문 앞에 걸려있는 가격표가 이상했다. 메뉴마다 전부 값이 두 개로 적혀 있었다. 하나가 다른 것보다 20% 정도 쌌다. 주인한테 물으니 하나는 현금으로 낼 때고, 다른 하나는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 가격이라면서 다른 식당들도 다 그렇다고 했다. 버젓이 탈세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가 자랑하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파르테논 신전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경험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이 유서 깊은 신전의 기둥과 벽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무더기를 들고 나왔다. 더 이상한 것은 주변에 이를 감독하거나 관리하는 공무원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잠시 기념으로 하나 갖고 나갈까 갈등했던 기억이 난다.
주말이 되면 아테네의 도로는 요트를 뒤에 매단 채 코발트색의 아름다운 에게해로 향하는 차량으로 뒤덮였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고급스런 휴양 행렬을 보지 못했다. 그리스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였나 하고 갸우뚱했다. 아테네 주재 한국 외교관에게서 부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재산은 전부 해외로 빼돌리고, 놀러 갈 때만 요트를 끌고 들어오는 게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국민은 가난해도 국가는 강한 나라가 일본이라면, 그리스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처음 본 그리스는 그런 모습이었다.
당시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막 발효돼 유럽의 단일 통화 작업이 한창 속도를 낼 때였다. 그에 맞춰 그리스가 단일통화권에 들어올 자격이 되느냐가 논란이 되던 시기였다. 조약 규정대로라면 국가부채와 연간 재정적자는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60%와 3%를 넘으면 안됐다. 그리스는 이 기준에 턱없이 못 미쳤다. 그럼에도 그리스가 유로존에 어려움 없이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유로존을 통화동맹이라는 경제적 시각이 아닌 거대한 유럽합중국을 실현하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화폐는 통일한다고 해놓고, 이를 정책으로 뒷받침할 재정과 금융은 회원국 주권에 맡기는 이율배반적 행동은 우선 유럽의 덩치를 키우고 보자는 정치논리에 휘둘린 탓이었다.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그야말로 횡재를 했다. 같은 회원국이라는 이유로 국가 프리미엄이 유럽의 강국이던 독일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이렇게 끌어온 돈으로 흥청망청 호시절을 구가했다. 매년 사회보장으로 들어가는 비용 증가분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보다 높았고, 퇴직 후 받는 연금은 독일 근로자의 수배에 달했다. 그리스가 1981년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할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부자클럽'으로 여겨지던 EEC에 가난한 그리스가 들어간 것을 두고 그리스가 서구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것을 우대한 것이라든가, 적대 국가인 터키의 침공을 유럽이라는 울타리로 막아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사실 태동 당시 유로존이 보였던 도덕적 타락은 그리스 뿐만은 아니었다. 자국 화폐를 유로로 환치하면서 돈잔치를 한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회원국이 마찬가지였다. 당시 막 통일을 이룩한 독일 역시 막대한 통일비용을 마련하느라 재정건전성은 뒷전이었다. 통일 후 동서독의 화폐교환비율이 동독과 서독의 경제력 차이를 감안하면 수십 대 1은 돼야 함에도 1대1로 등가교환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유로화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하고 지금 유로존의 리더로 성장한 것은 마르크화보다 약한 유로의 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유럽과 전세계를 혼란으로 몰고 가는 유로존 위기의 책임을 그리스 등 일부 유럽 빈국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얘기다.
통합을 모토로 한 유로존이 그리스의 탈퇴를 거론하며 공동체의 꿈마저 위태롭게 하는 분열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이제라도 정치논리가 아닌 원칙에 입각한 통합 노력이 절실하다.
황유석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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