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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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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39>

입력
2012.05.2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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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는 따로 겹집 뒷방의 작은사랑채에서 형과 아래 윗방을 쓰며 지냈다. 아직도 동이 어멈을 유모로 알고 있는 누이동생 덕이는 행랑의 제일 큰방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신이는 그들에게로 가서 함께 밥을 먹었고 동이 어멈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갈 무렵에 서당에서 준이의 저러한 되바라진 말대꾸가 나왔던 셈이었는데, 송 초시는 적당한 날을 잡아 약방에 마실을 나왔고 평소처럼 이 의원과 둘이서 약주를 나누었다. 술이 몇 잔 오간 뒤에 초시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의원에게 조심스럽게 귀뜸해주었다. 그날 이지언은 훈장이 돌아가자마자 격노하여 준이를 사랑에 불러다가 손수 매를 들었다. 그는 장죽을 거꾸로 잡아 매를 삼았는데 아들을 목침 위에 세워놓고 담뱃대가 부러지도록 때렸다.

지금 나라에서도 공노비를 속량하고 서얼허통을 공론 삼는 것은, 뒤늦게나마 양반부터 하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백성이라는 천하의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 이 고얀 놈, 내가 너에게 글을 배우고 읽으라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배우라는 것이었거늘, 누가 벼슬하는 글을 배우라더냐? 이 못된 놈, 하물며 피를 나눈 아우를 남들 앞에서 능멸했다지?

그리고 이튿날 유 씨 부인은 아들 준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몇 달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이 의원은 그 뒤부터 맏아들 준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고, 그와는 달리 둘째 신은 약방 사랑으로 불러다 책을 읽게 하거나 사서의 독후감을 묻기도 했다. 송 초시의 말에 의하면, 이 의원이 신의 재주가 아까우니 무과라도 치르게 하면 어떤가를 물었고 송 초시는 답했다고 한다. 그냥 초야의 선비로 공부하고 글 읽게 하면 나중에 자신이 알아서 살아갈 길을 찾게 될 것이라 우리가 따로 염려할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이는 송생과 장날에 나갔다가 책전이 벌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고리 함에 천 멜빵을 걸어 짊어지고 온 장사꾼이 자리를 펴고는 함에서 책을 꺼내어 늘어놓고 있었다. 방각본이었는데 <만세력> <당사주> <오륜행실도> 그리고 이야기책들이 있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장끼전> <토끼전> <변강쇠전> <두껍전> <이춘풍전>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등은 가끔씩 지나가던 소리꾼들의 아니리와 소리에서 듣던 것들도 있었고, 나중에 도방 대처로 나가서 <박씨전> <임경업전> <유충렬전> <홍길동전> <전우치전> 그리고 <창선감의록> <숙향전> <숙영낭자전> <옥단춘전> 등도 읽게 되었는데, 그날은 떡 본 김에 제지낸다고 주머니를 털어내어 <춘향전> <심청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을 샀다. 얼른 몇 장을 들춰보니 동이 어멈이 좋아할 것 같다고 신이가 송생에게 말했다는 거였다.

그날부터 행랑채 동이 어멈 방에서 신이가 이야기책을 읽기 시작했고 하인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함께 들었다. 약방 곁꾼은 아예 약초와 작두를 가지고 와서 방문 앞에 주저앉아 일하면서 들었고, 동이 어멈 또래의 부엌댁과 하녀와 사랑채의 마당쇠까지 모여 앉게 되었다. 신이는 책을 펴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서문 밖, 삼십 리쯤 되는 곳에 한 퇴리가 있었으니 성명은 최만춘이라 하며, 아내 조 씨와 더불어 이십여 년을 같이 살아왔건만 슬하에는 일점혈육이 없더니 최만춘 내외는 이로 말미암아 근심을 마지아니하여 명산대찰에 기도와 불공도 하고, 곤궁한 사람을 살려주는 적선도 하여, 한편으로는 의약을 써 몸을 보하기도 하여 그러구러 하는 사이에 신명이 감응하였든지, 그러하지 아니하면 정성이 지극하였든지, 부부가 한 가지로 신기한 꿈을 얻더니 이내, 부인에게 태기가 있더라.

열 달이 차매 하루는 조 씨 부인이 신기가 불편하므로 자리에 누워 있었더니, 갑자기 그윽한 향내가 방 안에 감돌며 문득 한 옥녀를 낳더라. 만춘의 기뻐 날뛰는 양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거니와, 다못 딸아이를 낳게 됨을 섭섭히 생각하고 내외가 서로 위로하며 재미롭게 키워내더라.

딸아이의 이름을 콩쥐라고 지어 손바닥의 보옥같이 애지중지 사랑하여 남의 귀공자를 부러워하지 아니하며,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하고, 어서 바삐 자라기를 주야로 바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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