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사의 도시서 메마름·비열함의 잔영을 더듬다
역시 차가 필요했다. 산 페르난도 밸리, 선셋 스트립, 패서디나, 할리우드… 소설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 bye)> 에서 주인공 필립 말로가 올즈모빌을 몰고 쏘다니던 공간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출발 전 험상궂은 인상의 호텔 벨보이는 "이 도시의 대중교통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실제로 그랬다. 지하철을 타보고 다시는 어떤 벨보이도 의심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기나긴>
혼다 CR-V를 빌렸다. 휘발유 85달러어치를 넣고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이 켜졌다. 자판을 두들겨 이렇게 입력했다. 말하자면 이번 여행의 목적지. "down mean streets(비열한 거리로!)" 내비게이션은 알아듣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의 자동차에 탑재돼 있기엔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기계로군." 말로의 말투로,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수 너머로 푸른 아지랑이가 언덕을 배경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양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야트막한 산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불었다. 공기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열기도 적당히 쓸어버렸다. 누군가 그런 식으로 계획해놓았다. 천국 주식회사, 특정인 전용 공간. 가장 근사한 사람들에게만 개방됨. 중유럽 출신들은 절대 불가. 오로지 백미 중의 백미, 상류계급 출신, 멋지고 멋진 사람만 출입 가능. 순금으로 된 사람들만.>호수>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 장르 문학을 낮추잡는 잘나신 분들 덕에 한국에선 B급 문화로 분류된다. 하지만 1930, 40년대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쓴 그의 추리소설은 지금도 하드보일드 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나의 영웅"이라 우러른 그 작가. 로스앤젤레스 여행길에 굳이 챈들러의 페르소나인 필립 말로의 뒤를 밟기로 한 건, 이 도시가 지닌 묵직한 색깔을 엿보는 데 그게 편한 방법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차가운 사막, 메마른 공기, 거칫한 인간의 표정 말이다.
<콜드워터 북쪽은 더워지고 있었다. 산등성이 꼭대기에 올라가서 샌프란시스코 계곡 쪽을 향해 돌아 내려갈 때는 숨이 턱턱 막혔고, 살이 타는 듯했다. 골짜기에는 두터운 스모그 층이 깔리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 사람들은 뭘 하는 겁니까? 폐타이어라도 태우는 건가요?" "아이들밸리 안으로 들어가면 괜찮아질 겁니다." 나는 달래듯 말했다. "그 대양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오거든요." "거기 술주정뱅이 말고 다른 것도 있다니 다행입니다.">콜드워터>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천사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천사는 테마파크와 할리우드와 쇼핑센터와 눈부신 비키니의 해변에서 여행객을 유혹하느라 연중 바쁘다. 뚱뚱한 가이드북에 가득 실린 그런 자본주의의 파사드만 찾아 다니는 건, 이 무국적 문화의 용광로 로스앤젤레스의 거죽만 핥고 돌아다니는 일이다. 캘리포니아의 여름이 시작되는 5월, 이번엔 천사의 호객행위를 뿌리쳤다. 그리고 고독한 탐정 말로와 함께 '누아르(Noir) 로스앤젤레스'를 배회했다.
<아무 느낌도 없다는 말은 정확히 맞았다. 나는 별들 사이의 공간처럼 텅 비었고 공허했다… 하루에 24시간, 누군가는 도망가고 잡기 위해 노력한다. 저 바깥, 천 가지의 범죄가 일어나는 밤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폭행을 당하며, 날아오는 유리에 베이고, 운전대에 부딪히거나 무거운 타이어 밑에 깔린다. 다른 도시보다 더 나쁠 것도 없는 도시, 부유하고 활기차고 자부심으로 가득 찬 잃어버리고 얻어맞고 공허함으로 도시.>아무>
로스앤젤레스는 서울만큼이나 옛 것을 존중할 줄 모른다. 도심은 고층빌딩에 잠식됐고 외곽은 온통 새로 조성한 주택가다. <빅슬립(big sleep)> 을 비롯한 챈들러의 여러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흑백 스크린 속의 그 풍경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도심 한가운데 남은 '히스토릭 다운타운(Historic Downtown)'에서 그나마 20세기 초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금융가와 고급 호텔 단지로 변해 있다. 챈들러가 "사기꾼과 마약광, 도색잡지 판매업자로 가득 찬 타락한 자들의 약속의 땅"으로 그려낸 도시의 분위기는 옅었다. 빅슬립(big>
도심에서 동쪽으로 차를 몰고 알라메다 스트리트를 건너가면 버려진 공장지대가 나온다. 여기가 1930, 40년대의 오리지널 다운타운이다. 이후 산업단지로 변했다가 1970년대 공장들마저 떠나 폐허가 됐다. 싼 임대료 덕에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지금은 '아트 디스트릭트(Arts District)'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무법천지로 변한다. 해가 진 뒤 그곳에 간다니까 터프한 벨보이가 다시 지뢰밭으로 소풍 가는 어린아이 보듯 말렸다. 그래도 갔다. 부랑자들은 온순했다. 총을 들이미는 대신 5달러에 사진 모델이 돼줬다.
<그렇게 하여 사립탐정의 하루가 지나갔다. 정확히 전형적인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재미도 별로 때로는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거나 감옥에 던져지기도 한다. 가끔은 죽을 있다. 두 달마다 번씩,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걸어다닐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문제와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온다.>그렇게>
글러먹었다. 기사가 끝나도록 필립 말로, 이 남자에 대한 얘기를 안 했다. 늘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체스를 두며 가족도 애인도 없는 남자, 길들여지지 않고 진심으로 다가오는 여자에게 무뢰한처럼 대할 줄 아는 남자, 냉소와 위악으로 무장하고 일당 20달러에 기꺼이 목숨을 거는 남자. 시크하게 여자를 떠나 보내는 아래 대목으로 그에 대한 설명을 대신한다. 타락한 천사의 도시를 여행하게 된다면 부디 이 매력적인 남자의 흔적을 찾아보기를.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어요?" "여섯 달도 못 갈 텐데." "이런, 맙소사. 그렇지 않다고 가정한다면요? 인생에서 뭘 기대하는 거죠?"…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택시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을 갖고 있다. 그 자식들은 모든 일에 어울리는 표현을 가지고 있고, 항상 맞는 말만 한다.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 여행수첩
●현지 여행사에 문의하면 문학과 예술을 테마로 한 관광 프로그램을 안내 받을 수 있다. 에소투어릭(www.esotouric.com)사는 버스를 이용해 문학과 뮤지컬, 건축 등을 테마로 한 여행 상품을 판매한다. 레이먼드 챈들러 버스 투어도 있다. 1-213-373-1947.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항공편은 선택의 폭이 넓다. 유나이티드항공(UA)은 기존 일반석보다 좌석 공간이 앞뒤로 약 15㎝ 넓은 '이코노미 플러스'석을 비즈니스석의 40~50% 요금에 제공한다. (02)751-0300.
로스앤젤레스=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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