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노후대책은커녕 아직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시는 초로의 부모님도 걱정이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슬쩍 고백하는 주변 사람들도 걱정이고, 체크카드를 긁을 때마다 줄어드는 잔액을 걱정하는 나도 걱정이다. 생각할수록 서글프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걱정들이 있을까, 마치 원죄처럼 말이다. 그런데 누구도 이 걱정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걱정이 많다는 것을 걱정할 뿐, 해결하려는 욕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부분은 '다 똑같아.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곧 좋아지겠지.' 라는 말들이 오간다. 이유는 모두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히 한 개인의 잘못을 넘어서 사회 시스템 자체가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안겨 주는 것이다. 이 무력감은 개선의지를 꺾고 단지 욕망하게만 한다.
며칠 전 잠이 오지 않아 사무엘 베케트의 를 다시 읽었다. 읽어가는 내내 든 생각은 살아온 삶 전부를 기다림으로 소비한 그 둘에게 기다림은 고통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 때문에 살아있을 수 있다는 역설이 그들을 진지하게 만들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그 진지함이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그냥 기다림에 익숙해졌다고나 할까. 마치 이제는 그들에게 기다림이 일상을 보내는 가장 유익한 방편이 된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어느덧 내 삶이 부조리에서 조리로 옮겨진 것이다. 그들에게 고도는 행복일지도 유토피아일지도 평화일지도 안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각박한 삶을 버티게 해준 해석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 실체가 뭐든 기다림이 그들의 삶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맞다. 그러므로 고도는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존재다.
이제는 누군가 해결해주기 보다 찾아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현안을 내놓을 현자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며칠 전 직장인 10명 중 7명은 자신을 가난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 내용은 대략 이렇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직장인 49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10명 중 7명 정도인 68.1%가 '나는 가난하다.'라고 답했다. 특히 빚이 있는 직장인(254명)의 81.5%는 '나는 가난하다.'라고 답했고, 빚이 없는 직장인 중에도 54.1%가 자신을 '가난'하다 말했다. 빚이 있는 20대 직장인 중에는 본인의 '학비/등록금'(73.2%)이 가난함의 원인이라는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언덕에서 마냥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이제 우리의 마취제다. 혹자는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너무 기다리고만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쯤 서서 한 번 가정해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고도가 나타난다면. 나타난 고도가 허름한 행색에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노인이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염원했던 우리의 해결책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갈림길에 설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부분을 기다리는 것에게 떠밀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뚜껑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재빠르게 결정하겠지. 다른 무엇을 또 기다리던지, 아니면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던지.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무능해진 것은 아닐까, 기다리는 핑계가 먹고 사는 일에 지친 우리에게 한숨을 없애줄 자잘한 위안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전 세대들이 꿈꾸던 것들이 성큼 다가온 것들을 우리가 받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 지 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내가 비관적인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는 교육 받은 대로 어쨌든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릴 테니깐.
천정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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