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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연계돼 토씨도 민감… 잠 못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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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연계돼 토씨도 민감… 잠 못 자요"

입력
2012.05.2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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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재고'라는 말 알겠죠?"

"그라믄요."

"7번 문제는 왜 항의가 들어왔나."

"답이 너무 허무하다는데요."

19일 서울 강북구 호텔아카데미하우스 세미나실. 전국 모의고사를 여러 번 출제한 적 있는 베테랑 국어 교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다음 달 중순 출간될 EBS 교재를 앞에 놓고 고뇌에 빠져있다. 교재의 집필자들인 이들은 5개월 전에 나온 초고에 오류가 없는지 반복 검토하고 있다. '2012 EBS 수능완성 언어영역 교재 합숙형 2박3일 집중검토' 둘째 날이다.

바쁜 학기 중 책 1권에 33명에 이르는 대규모 집필자 군단을 한 자리에 모은 까닭은 올해 처음 EBS가 도입한 사전공개검토제(OBTㆍ오픈 베타 테스트)에 따른 것이다. OBT는 2010년 교재에서 518건, 2011년 563건의 오류가 발견돼 곤욕을 치른 EBS가 마련한 특단의 조치로, 출간 전 교재 PDF파일을 홈페이지에 공개해 이견을 받아 '무결점 교재'를 내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며칠 사이에 언어영역에서만 약 500건의 의견이 접수됐고, 집필자 전원이 합숙을 하며 검토 중이다.

이창용 EBS 학교출판기획부장은 "어떻게 책이 나오기도 전에 파일로 공개하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EBS 수능 70% 연계로 학생들이 교재 속 토씨에도 민감하고 교재의 질이 중요해져 다른 손해가 있더라도 의견접수를 거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대구팀은 손을 짚어가며 문제와 접수 의견을 대조하고 있었다. 편집 실수로 답지 순서가 바뀐 문항이 1건 있었고, '답이 너무 잘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들은 4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몇 개 문제를 '대수술'했다. 합숙 전날까지 1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덕유산 야영을 한 뒤 부랴부랴 KTX로 상경했다는 대구 매천고 1학년 부장 송영필 교사는 "이견이 있거나 유사한 지문이 있어 문제를 통째로 버릴 때마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며 웃었다. 민송기 대구 능인고 교사가 "과학 관련 지문 하나를 만들기 위해 국어 교사가 아인슈타인, 뉴턴, 보일러 등의 논문까지 정독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치기 때문에 집필이 만만치 않다"고 거들었다. 정강욱 대구 강동고 교사는 "읽는 사람에 따라 거슬리는 문장 호흡까지도 항의가 들어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고 말했다.

"아이고 이거 우짜란 말이죠." 옆의 울산팀 책상에서도 장탄식이 나온다. 이 팀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검토 의견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서술자가 자신의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답에 대해 '어떤 소설을 가져다 놓아도 답이 되니 조금 더 어렵게 바꾸라'는 지적을 받은 이들은 꼬박 이틀을 고민해 새 선택지를 만들었다.

오후 8시에는 '신선한 눈'으로 수정본을 풀어볼, 집필자를 제외한 검토교사들이 세미나실에 들어왔다. 이상호 EBS 학교출판기획부 국어과 교과위원은 "집필자 스스로 무작정 고치다 보면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결국 원래대로 돌아오는 '아까 맨치로'현상이 나타나 계속 여러 사람의 시각에서 검토하도록 한다"며 웃었다. 집필자들은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의 심정을 절감하며 연신 물을 들이킨다. 검토자가 "고민 많이 하셨네요. 과학지문이 어렵긴 한데 시험이 아니라 교재니까 반복해 공부하면 괜찮겠죠"하자 그제서야 안심한 내색이다.

이날 검토는 20일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교사들은 "69만 수험생이 볼 교재라 오던 잠도 달아난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에서는 한 가닥 하는 학년부장, 연구부장, 호랑이교사들의 차림새가 연일 밤샘 끝에 영락없는 고시생이다. 이날 교사 수십 명이 씨름한 교재는 224쪽짜리 언어 교재 한 권일 뿐이다. 1~6월 발간되는 언수외 등 전 과목 수능 연계 시리즈 총 110권이 나오기까지 742명의 집필교사와 2,362명의 검토교사가 이 같은 '오류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고생을 감안하면 집필자가 받는 인세는 많지 않다. 동영상 강의 참여 교사의 경우 아예 1년간 학교를 떠나 연구와 강의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재 집필은 참여교사 규모가 상당해 교육과학기술부와 EBS 모두 부담이 크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좋은 문제를 제공하고, 사교육비 절감에 기여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고행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교과부에 따르면, 2011년 EBS 교재로 학습한 일반고 학생은 다른 학생에 비해 사교육비를 약 9만원 적게 썼다. 교사 자기개발 효과도 크다. 부산 성일여고의 김덕곤 교사는 "OBT 도입으로 지난해보다 2~3배나 힘들었지만 문제 출제는 교사들이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회"라며 "지난해 교재에 택했던 문학작품이 수능에 출제됐을 때, 좋은 교육적 지문을 발굴한 기분이 들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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