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짚은 볏짚 보릿짚 등 다른 짚풀과 함께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유용하게 사용해온 생활소재다. 표면에 기름기가 있어 물이 잘 스며들지 않고 단열성과 통풍성이 뛰어나 여름용 모자 소재로 최적격이다. 보릿짚 모자도 있지만 튼튼함이나 윤기 등 실용성 면에서 밀짚모자에 미치지 못한다. 밀짚모자가 짚으로 만드는 모자의 대명사가 된 것은 당연하다. 조상들이 언제부터 밀짚모자를 쓰기 시작했는지 기록은 없지만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반도 밀 재배와 역사를 같이 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 요즘에는 다양한 인공소재 모자가 많이 등장해 밀짚모자의 효용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농촌생활에는 아직도 밀짚모자가 필수품이다. 농민의 땀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밀짚모자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상징하기도 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농사철이면 들녘에 나가 밀짚모자 쓰고 일손을 돕고 농민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대통령의 서민친화적인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데는 그만한 이벤트가 없다.
■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밀짚모자가 가장 어울리는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밀짚모자 쓰고 막걸리잔 기울이는 사진에서는 권위적 분위기가 강하게 감도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다른 대통령들의 밀짚모자는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밀짚모자 쓴 노 전 대통령은 시골아저씨처럼 자연스럽다. 퇴임 후 고향 봉하마을에서 밀짚모자 쓴 그가 외손녀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짠하면서도 진한 인상을 남겼다.
■ 오늘이 노 전 대통령의 3주기다. 봉하마을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추도식, 전시회, 문화공연 등 다양한 추모행사가 이달 내내 이어져 왔다. 그 행사들엔 밀짚 모자 쓴 그의 캐리커처가 빠지지 않는다. 만화가 강풀이 밀짚모자로 노무현을 형상화한 디자인의 티셔츠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한 트위트리언은 "밀짚모자 하나만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멋진 사람이 대통령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글을 올렸다. 밀짚모자는 이제 서민스러웠던 노무현의 상징이 되었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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