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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근대가요 가수로 나선 근대가요 학자 장유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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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근대가요 가수로 나선 근대가요 학자 장유정 교수

입력
2012.05.2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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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직업은 교수다. 단국대 천안캠퍼스 교양학부 장유정(40) 교수. 어릴 때 꿈은 가수였다. 고등학생 때는 라디오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장원도 했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떨어지면서 꿈을 접었다. 대신 대중가요 연구로 돌아섰다. 민요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일제 시대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2년 뒤 책으로 나와서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 일제 때 인기를 끈 만요(웃기는 노래)의 제목을 딴 이 책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만요바람이 불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대중가요 연구자로 첫손에 꼽히는 그는 이달 3일 가수로 데뷔했다. 1930년대 대중가요인 '외로운 가로등'을 리메이크해서 디지털음원을 공개했다. 황금심이 처음 불렀고 이미자 한영애도 리메이크한 유명한 트로트. 트로트는 그가 가장 좋아하면서 세상이 오해하는 게 가장 안타깝다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는 진짜 트로트를 들려주겠다며 이 노래에 '근대가요 다시 부르기'라는 기획을 붙였다. 둘째, 셋째곡을 준비중인 그를 만났다.

_트로트라는데도 아주 담백하고 운치있네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트로트는 80년대 후반 뽕짝메들리가 나오면서 변질된 트로트지요. 1930년대에 처음 생겨난 트로트는 지금처럼 노골적이지 않았어요. 황금심씨 '외로운 가로등' 들어보면 가사 자체는 슬프지만 굉장히 담담하게 불러요. 템포도 빠르고요. 가성 썼고요. 가성 쓰면서 노골적일 수는 없거든요. 제가 '외로운 가로등'을 리메이크한다고 하니까 진짜 끈적끈적하게 불렀겠구나 했는데 원곡은 그렇지 않았어요."

_그런데 왜 하필 트로트를 부르게 됐어요?

"트로트가 요즘은 성인가요로 코믹화했는데 원래의 트로트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일러드리고 싶었어요. 인터넷에 잘못된 자료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바로잡고 싶었고요. 2000년부터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일제시대 대중가요 자료를 찾고 노래도 계속 들었거든요. 들어보니까 제가 알았던 트로트 뿐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노래들이 존재하더라고요. 지금 불러도 굉장히 세련된 느낌? 그래서 이 노래 한번 불러보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작년 12월에 지인들이 모여서 트로트배틀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옛가요모임 유정천리 부총무로 있는데 트로트 애호모임이 여러 개가 있어서 모임마다 4명씩 대표로 나와서 홍대 앞에 카페를 하나 빌려서 트로트배틀을 했어요. 작년이 3회째인데 재미있어요. 빤짝이 옷 갖다놓고. 제가 '다방의 푸른 꿈'을 불러서 결승까지 올라가서 '외로운 가로등'을 불러서 우승을 했어요. 1등상은 트로피하고 종이 한 장 인데 트로피는 돌려줘야 하는 거고 종이를 펼쳐보니까 '짱'이렇게 한 글자만 써있었어요.(웃음) 노래를 하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났는데 트로트배틀에서 1등을 하면서 자신감을 확 얻었어요. 그래서 펜화가인 아버지(장봉기)한테 옛날 노래책에 나온 식으로 흑백 펜화도 그려달라고 해서 표지도 만들고 노래를 녹음했지요."

_노래를 상당히 잘하던데요.

"그래요?(웃음)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이 가수였어요. 다섯 살 때부터 노래프로는 다 봤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송승환씨가 진행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라디오프로에서 1주일에 한번씩 '우리들의 가요제'라고 노래자랑을 했어요. 거기에 나가서 변진섭씨 노래 '우리들의 사랑이야기'로 1등 했어요. 나중에는 KBS 남한강수련원에서 1박2일 동안 상반기 기말결선을 했는데 거기 나가서 대상을 받았어요. 청소년잡지에도 나가고 펜레터도 받고 생일 때면 학교로 선물이 몰려들어서 이틀에 걸쳐 선물을 가져가야 할 정도였어요. 가수 하자는 제의도 받았지만 고등학생이 노래한다는 게 겁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대학가요제가 로망이라 대학에 꼭 가서 거기를 나가야겠다 그렇게 진로를 정했어요. 국문과(덕성여대) 간 것도 거기 가면 가사는 다 쓸 수 있는 거다, 그래서 갔는데 일단 좋은 노래를 만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판소리 재즈댄스 기타 피아노 배우러 다녔는데 대학교 3학년 때야 이제는 마지막이다 싶어서 누가 군대가면서 던져준 노래를 받아서 가사를 급히 바꿔서 대학가요제에 나갔는데 예선에서 떨어졌지요. 같이 간 친구한테 제가 그랬어요. '열정만으로는 안되는 게 있는 거 같다. 여기서 접어야겠다.' 그때 대중가수가 안 되면 대중가요를 연구해야겠다 마음먹은 거에요. 대중가요를 연구하려면 먼저 구비문학부터 공부해야겠다, 서울대를 가야겠다. 그래야 사회에서 대중가요를 인정해주겠다 생각이 들었고 학비도 싸잖아요.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공부하면서 (서울대) 대학원을 가게 됐어요. 모내기노래 연구인 '교환창 모노래의 2행시 구성방식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지요. 박사학위 논문은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를 썼고요. 당시에 서울대에서 대중가요로 박사학위 준다고 반대도 많았다는데 서대석 선생님이 의미 있다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_트로트도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저도 트로트에 대해서는 왜색이다 일제시대 모든 문화를 말살시키고 당시 대중들을 식민지문화에 순응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비판을 듣고 자라서 텔레비전에 트로트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정말 학교 가서 공부하고 집에만 오던 시절인데 새벽에 버스에서 운전사하고 저하고만 있는데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어' 그 노래를 딱 듣는 순간, 대성통곡을 했어요. 짝사랑하다 실연도 했고 앞날은 분명하지 않고 그게 가사랑 딱 떨어진 거지요. 내가 천박하고 왜색이라 말했던 노래가 어떤 사람한테는 굉장히 위로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마을버스를 탔는데 트로트메들리를 계속 틀어놓는 거에요. 집이 마을버스 종점이라 저랑 할머니랑 탔는데 저는 내내 시끄러웠지요. 그런데 종점에 도착해서 할머니가 '기사양반,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내릴 수가 없어' 그러더라고요. 그 순간 뒤통수를 딱 치는. 그렇구나. 내가 옳다는 것만 진리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구나. 학문하는 목적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하나하나 깨는 것이고 그게 성숙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우리 구비문학을 연구하자, 사람들이 과거를 잘 모르니까 트로트는 외부문화의 강제이식이나 전통문화의 단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_연구해봤더니 과연 트로트는 이식이나 단절이 아니었어요?

"가사 측면에서는 한국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어요.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한국인이한국어로 쓴 거에요. 특히 만요는 당시의 세태를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웃음으로 담은 거잖아요. 그런 내용이 외부 문화의 이식은 아니지요. 신민요도 변질이다 그러는데 전통가요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실험이었어요. 서양악기하고 합주하고. 지금 보면 비빔밥 짬뽕처럼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는 노력을 했던 거지요. 일제 때 인기를 끌던 유행가를 보면 '황성의 적(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처럼 나라 잃은 슬픔을 그린 곡들이 많아요. 일제시대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대중들이 공감했던 거예요."

_옛날 노래 가사를 보면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것들이 많지요.

"안서 김억 같은 시인이나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던 영문학자 이하윤씨, 박노홍씨 같은 작가들이다 유명한 작사가였어요. 가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대중음악이 시대정서를 읽어냈는데 그 가치를 너무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쉬워요.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는 채규엽씨는 음악을 전공한 음악교사 출신인데 '이게 대중을 위한 위무제다'는 생각을 갖고 직업가수로 투신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어요. 이난영씨 남편으로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해송씨는 작곡하지 않은 장르가 없고 김송규라는 이름으로 노래도 불렀고 팔방미인으로 문화활동을 했어요. 김해송씨는 납북되면서 작사가 조명암씨는 월북을 하면서 노래가사를 그대로 쓸 수 없게 되었거든요. 대신 개사는 허용했는데 원곡 가사와 개사된 가사를 연구하는 과제도 남았고요. 일제시대 대중가요를 보면 당시에 이미 얼굴없는 가수가 나와서 신비주의 전략을 쓰기도 했고 전통음악을 아는 기생들이 대중가요로 투신한 기생가수 시대도 있었고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다채로운 문화활동이 당시에 벌어졌어요. 당시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런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_트로트는 도대체 뭔가요?

"트로트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장르에요. 1930년대부터 등장한 유행가 양식을 1950년대부터 '도로또'로 음반에 표기하기 시작했어요. 외국에 폭스트로트라고 2박자로 춤출 때 쓰는 것은 있지만 트로트는 없어요. 일본에서 당시 유행하던 엔카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엔카하는 분들은 트로트하고 다르다고 해요. 그런데도 유독 우리나라에서 엔카의 영향을 굉장히 강조하지요. 물론 트로트 장르가 발생한 건 일본대중음악의 영향이라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일본이 들여와서 억지로 유행시킨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들어보고 이거 좋은데 해서 유행하게 된 거에요. 일본에서 엔카말고도 음두라는 장르도 굉장히 유행했지만 그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전혀 빛을 못 보거든요."

_한때는 우리나라 트로트가 엔카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말도 있었잖아요.

"고가 마사오씨라고 일본 엔카에 유명한 작곡가인데 그 사람이 선린상고 다니면서 한국에서 살았어요. 그 분이 우리나라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나중에 그 분이 일본에 가서 엔카 작곡가로 유명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엔카 작곡에 영향을 줬다 그러는데 그거는 음악적으로 이야기할 때 고가 마사오 개인한테는 있었겠지만 우리나라 트로트가 탄생했을 때는 일본 유행음악 엔카가 영향을 준 거는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그게 우리나라 음악이 아닌 거는 아니라는 거지요."

_근대가요 다시 부르기, 다음 노래는 뭐예요?

" '다방의 푸른 꿈'과 '이태리의 정원'을 함께 준비중이에요. '이태리의 정원'은 1936년에 무용가 최승희씨가 부른 노래에요. 원곡은 에르윈이라는 사람이 작곡한 외국곡인데 작사는 이하윤씨가 했고 제가 광복이전 노래 중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에요. 박사 논문 쓸 때 하루 10시간 이상씩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보면 정말 사람이 피폐해가지고 내가 왜 이러구 있나,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생각도 드는데 이 노래가 저를 위로해줬어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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